학술대회논문

고대 아테네와 로마의 개천제

김현일(상생문화연구소)

2024.12.27 | 조회 192


목차


1.서론

2.아테에의 건국사화

3. 판아테나이아 제전

4. 로마 건국사화

5. 파릴리아 축제와 타렌툼 축제

6. 백년제

7. 결어


 

1. 서론

 

고대 아테네와 로마는 서양의 대표적인 국가였다. 아테네는 BCE 6세기 이후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 가운데 가장 크고 강력한 국가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상공업이 발전하였을 뿐 아니라 민주정치도 발전하였으며 민주정치와 함께 아테네의 대외적 영향력도 크게 확대되었다. 페르시아 제국의 침략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태동한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안보동맹인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 패권주의의 도구가 되었으며 아테네는 동맹의 자금을 유용하여 화려한 건축물들을 짓는 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델로스 동맹 도시들을 힘으로 지배한 아테네의 패권주의 정책이 종국에는 그리스 세계의 내전이라 할 수 있는 펠로폰네소스 전쟁(BCE 431-404)을 불러왔고 이 전쟁에서 패배한 아테네는 정치적으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리스 세계의 패권은 경쟁국 스파르타로부터 테베를 거쳐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넘어갔고 아테네는 결국 정치적 자유를 상실하였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왕국과 그 뒤를 이은 로마의 지배 하에서 아테네는 정치적으로는 중요성을 상실하였지만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로서는 오랫동안 명성을 떨쳤다. 아테네는 그리스 세계의 문화 수도로 남았던 것이다.

줄곧 도시국가(폴리스)의 성격을 탈피하지 못했던 아테네와는 물론 로마는 도시국가로 출범하였지만 BCE 4세기와 3세기 동안 이탈리아 반도를 정복한 후 지중해 연안의 대부분 지역을 지배하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 한마디로 하자면 작은 도시국가로부터 세 대륙에 걸친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한 것이다. 지중해 세계를 장악한 로마는 그리스는 말할 것도 없고 소아시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등 다양한 문명권을 지배하는 통일적 세계제국을 자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CE 3세기 이후 내부적 혼란에 빠져들어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4세기에는 광대한 영토의 지배를 위하여 서로마와 동로마로 나뉘었다가 5세기 말 게르만족 이동 사태 속에서 서로마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동로마제국은 비잔틴제국이라는 이름으로 그 후에도 근 천년이나 존속하였다. 로마는 고대와 중세 2천년 이상에 걸친 장구한 역사를 남긴 것이다. 로마를 빼고는 서양의 고대와 중세를 논할 수 없다.

고대 서양을 대표하는 이 두 국가 모두 건국설화와 건국을 기념하는 축제 즉 건국기념제를 갖고 있었다. 본고는 한국의 개천제에 해당하는 고대 아테네와 로마의 건국제를 간단히 살펴보려고 한다.

 

2. 아테네의 건국사화

 

고대 서양의 주요한 역사서로 꼽히는 플루타르코스(CE 46-119)󰡔영웅전󰡕은 모두 50명의 그리스, 로마 위인들의 생애를 대비형식으로 서술한 책이다. 이 책은 아테네의 건국자인 테세우스와 로마의 건국자인 로물루스로부터 시작한다. 테세우스에 의하면 아테네는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 건국되었다. 그런데 플루타르코스 책에는 그 부친 아이게우스가 이미 아테네의 왕이었다고 한다. 그 부친이 아테네 왕이었는데 테세우스가 아테네를 건국했다는 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역사가들은 테세우스 이전에는 작은 국가에 불과하였던 아테네가 아티카 지방의 여러 나라들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였다고 본다. 함께 산다는 시노이키스모스’(synoikismos)라는 그리스 말이 이러한 통합을 나타낸다. 테세우스는 부친의 사후 아테네 주변의 여러 나라들을 돌아다니며 한 곳에 모여 살자고 즉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세우자고 사람들을 설득하였던 것이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테세우스의 이러한 제안에 평민과 가난한 사람들은 찬동하였지만 권세 있는 사람들은 그 제안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테세우스는 자신은 전쟁과 법률에만 관여하고 나머지 분야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관여할 수 있도록 정치제도를 만들겠다고 양보하였다. 설득에 성공한 테세우스는 각 나라의 청사와 의회, 권력기구를 폐지하고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공통된 하나의 청사와 의사당을 세웠다. 그리고 이렇게 세워진 통일된 나라의 이름을 아테네라 부르고 판아테나이아 제사를 공통의 제사로 정하였다. 이 판아테나이아 제사가 아테네의 건국제라 할 수 있다.

아테네를 건국한 테세우스라는 인물이 전설상의 허구가 아니라면 그는 어느 시대 사람이었을까? 플루타르코스는 테세우스가 그리스의 전설적인 영웅 헤라클레스와 함께 흑해로 가서 아마존 여인족과 싸웠다는 그리스의 전설도 소개하고 있지만 테세우스의 경쟁자였던 메네스테우스 이야기가 테세우스 시대를 추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메네스테우스는 테세우스를 미워하던 아테네 귀족들을 선동하여 반테세우스 운동을 벌인 인물로서 테세우스 사후에 그를 이어 아테네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이 메네스테우스는 트로이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일리아스󰡕의 몇 군데에서 그 언급을 찾아볼 수 있다. 󰡔일리아스󰡕 2권에서는 그가 아테네 파견부대의 우두머리로서 말들과 방패를 든 전사들을 정렬하는 데서는 지상에 사는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그를 당할 자가 없다고 하였다. 󰡔일리아스󰡕의 기록을 믿는다면 메네스테우스는 아테네군의 통솔자 즉 왕이었다. 아테네가 트로이 원정에 파견한 선박은 50척으로서 당시 아테네는 후세처럼 그리스의 지도적 국가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플루타르코스는 테세우스전에서 테세우스의 아들들이 평범한 시민으로 자라 트로이 공격에 참여하였으며 메네스테우스가 트로이 원정에서 전사하자 아테네로 돌아와 왕권을 되찾았다고 한다.

플루타르코스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판아테나이아 제전에 대해서 테세우스가 제정한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다른 이야기도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 신화와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아폴로도루스의 󰡔비블리오테카󰡕에서는 아테네 왕 에릭토니우스가 판아테나이아 제전을 창시하였다고 한다. 에릭토니우스는 아테나 여신과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 사이에서 원하지 않은 수정으로 낳은 아들인데 아테나 여신이 다른 신들 몰래 아크로폴리스에서 키웠다고 한다. 그는 자라서 암픽티온을 아테네 왕좌에서 내쫓고 왕이 되었다. 아폴로도루스에 의하면 에릭토니우스는 아크로폴리스에 나무로 된 아테나 여신상을 세우고 판아테나이아 제전을 창시하였다.


3. 판아테나이아 제전

 

판아테나이아 제전은 그리스의 정월에 해당하는 헤카톰바이온 달에 개최되었다. 현재 달력으로 하면 초여름 즉 7월쯤이다.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는 제사에는 소 백 마리가 바쳐졌는데 헤카톰베가 백 마리 소의 희생을 의미하는 것이니 달 이름 자체가 판아테나이아 제전과 연관되어 있다. 제사 이전 행사로는 가무 경연과 운동경기가 열렸다. 가무와 운동경기는 제물처럼 신들을 즐겁게 하기 때문에 개최한 것이다. 축제의 가장 중요한 행사였던 제사는 헤카톰바이온 달 28일에 열렸는데 이 날 시민들은 시내로부터 아크로폴리스까지 가두행렬을 벌였다. 제사에서 사용할 짐승들과 빵 바구니, 여신에게 바칠 옷을 갖고 행진하였는데 여신에게 바칠 옷은 아테네의 선발된 소녀들이 수개월간 제작하였다.

판아테나이아 제전은 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모든 아테네 시민의 제전이었기 때문에 아테네 시민들이 모두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후일에는 그리스 도시들도 초청을 받아 판아테나이아 제전은 올림피아드와 함께 전그리스적 축제로 확대되었다. 아테네의 참주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BCE 600-527)는 판아테나이아 제전을 크게 확대한 인물이다. 󰡔아테네의 국제󰡕에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아테나 여신을 이용한 기록이 나온다. 그는 아테네인들에 의해 추방되었던 자신을 아테나 여신이 다시 아테네로 복귀시켰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한 외국인 미녀를 아테나 여신처럼 꾸며 함께 전차를 타고 길을 내달렸는데 당시 아테네인들은 그 모습을 보자 두려움에 휩싸여 땅에 엎드렸다고 한다.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이 아테네인들에게는 큰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이야기에서 뿐 아니라 페리클레스의 건축 사업에서도 잘 드러난다. 주지하다시피 페리클레스(BCE 495-429) 시대는 아테네의 민주정치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로서 여러 공공건물들이 대거 세워진 시대였다. 건축에 들어가는 막대한 자금은 아테네가 주도한 델로스 동맹의 기금을 유용하여 조달하였는데 아테나 여신을 모시는 파르테논 신전은 바로 이 건설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15년에 걸쳐 건축된 신전 내부에는 아테나 여신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2세기 그리스 여행가 파우사니아스에 의하면 금과 상아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참주정 시대 이후 판아테나이아 제전은 아테네를 넘어서 전그리스적 축제로 자리 잡았지만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배로 정치적으로는 쇠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BCE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립포스 2세는 아테네와 테베를 중심으로 한 폴리스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리스 폴리스들에 대한 지배를 확립하였다. 이후 아테네는 정치적으로 더 이상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테네는 여전히 경제적으로 번창하였으며 문화적으로는 그리스 세계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아테네는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는데 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세운 아카데미아와 리케이온 학당은 수백 년 동안 지중해 세계에서 큰 명성을 누렸다.

판아테나이아 제전은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한 이후 다른 전통적 제전들과 마찬가지로 쇠퇴하였다. 4세기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이교신전 폐쇄령을 내렸는데 파르테논 신전은 6세기말 이후로는 아테나 여신의 신전이 아니라 성모마리아 교회로 전용되었다.


4. 로마 건국사화

 

플루타르코스는 <로물루스>에서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의 혈통에 관해 여러 가지 설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트로이 왕자 아이네아스의 후손인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하였다는 이야기를 받아들였다. BCE 1세기에 살았던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가 쓴 󰡔로마사󰡕에서는 아이네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우스가 트로이 정착민들의 정착촌인 알바 롱가를 세우고 그 후손들이 그곳의 왕 노릇을 하였다고 한다. 아이네아스로부터 15대 정도가 지난 BCE 8세기 중반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 형제 사이에 왕권을 놓고 싸움이 일어나 아물리우스가 왕위를 찬탈하였다. 아물리우스는 형의 두 아들을 죽이고 조카 딸 레아 실비아는 베스타 여사제로 만들어버렸다. 레아 실비아는 강간을 당해 두 쌍둥이 아들을 낳게 되었는데 아이들의 아버지가 군신 마르스라고 하였다. 독신을 지켜야 하는 베스타 여사제의 규율을 어긴 것이 되었기 때문에 아물리우스는 레아 실비아를 감옥에 보내고 아기들은 티베르 강에 버리라고 하였다. 운이 좋게도 강에 버려진 아기들을 담은 바구니가 홍수를 만나 마른 땅에 닿았다. 암 늑대가 젖을 먹여 아기들을 살렸다. 얼마 후 왕의 목동 파우스툴루스가 아기들을 발견하여 집에 데려가 키웠다. 두 아기는 자라서 목동이 되었다.

형제는 장성하여 아물리우스 왕에게 반감을 가진 사람들을 이끌고 반란의 선봉에 서서 아물리우스를 죽였다. 그리고 자신들의 외조부인 누미토르에게 권력을 넘기고 알바를 떠나기로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릴 때 자라던 곳으로 가서 새로운 도시를 세우려고 하였다.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에게 많은 노예들과 도망자들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큰 무리가 형성되었다. 형제는 자신들에게 도망쳐온 노예, 채무자, 범법자들을 보호기 위해 아실라우스 신전을 만들어 이곳을 안전한 피난처로 만들었다.

도시의 입지에 대한 의견차이로 인해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이고 도시 건설에 착수하였다. 그는 도시건설을 에트루리아로부터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신성한 법칙에 따라 진행하였다. 예를 들어 회의장이 위치한 코미티움 둘레의 호에는 모든 수확물들의 첫 열매를 시민들의 고향에서 가져온 흙들과 함께 묻었다. 코미티움은 도시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로마는 그 둘레에 세워졌다. 로물루스는 쟁기에 황동보습을 박아 그 쟁기를 이용하여 도시의 성벽이 들어설 곳을 지정하였다.

종교적 의식처럼 거행된 로마시의 건설은 421일부터 시작되었는데 그래서 로마인들은 이 날을 건국기념일로 정하고 매년 성스러운 행사를 거행하였다. 로마의 건국절은 성스러운 날이라서 살아 있는 짐승을 희생으로 쓰지 않았다고 한다. 로마의 건국연도는 플루타르코스의 말에 의하면 제6회 올림피아드 3년이었다. 이는 BCE 754년에 해당한다.


5. 파릴리아 축제와 타렌툼 축제

 

아우구스투스 시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BCE 43-CE 17)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시로써 집대성한 󰡔변신이야기󰡕의 저자로 유명하지만 󰡔로마의 축제일󰡕은 로마의 축제일들의 유례와 축제일에 행해지던 관습에 대해 시로서 지은 책이다. 그는 로마인들의 축제일과 기념일들을 월별로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책이 완성되지 못했던지 6월까지만 시가 남아 있다.

로마의 건국일에 행해진 축제는 엄밀히 말해서 로마 건국기념제라기 보다는 파릴리아 축제였다. 파릴리아 축제는 가축의 수호신 팔레스 여신에게 제사를 올리고 가축과 가축을 돌보는 목동들을 보살펴 달라고 기원하는 축제였다. 축제 때 불타는 짚 무더기를 뛰어넘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는 불을 통한 정화를 상징하였다. 원래는 목동 축제였던 이 축제가 로마의 건국 기념일과 겹치는 바람에 건국제처럼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파릴리아 축제가 로마의 건국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전통적인 농목 축제였기 때문에 로마의 건국제를 새로이 조직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때인 BCE 17년에 로마가 거행한 대규모 축전은 세기 경기대회’(Ludi Saeculares)라는 이름으로 거행되었는데 한 세기(saeculum)마다 한번 개최되는 행사라고 하였다. 이 때 세기는 100년이 아니라 110년이라고 하였으며 조상들이 예전부터 하던 방식으로 거행한다고 하였다. 로마인들과 국가의 안녕과 행복을 여러 신들에게 기원하는 제사에 더해 대규모 경기대회가 열렸는데 그 때문에 행사의 이름을 놀이라는 뜻의 루디’(lud)로 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이 축제의 근거를 시빌 신탁서에서 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아마도 공화정 시대에 행해지던 타렌툼 축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축전도 세기에 한 번씩 열렸던 것 같다. 리비우스의 󰡔로마사󰡕 49권에 의하면 로마건국기원 603년 즉 BCE 149년에 하계신인 디스 파테르 신을 기리는 경기대회가 타렌툼에서 열렸는데 제3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다음해였다. 그 비슷한 경기대회가 그 100년 전인 제1차 포에니 전쟁 첫해에 개최되었다고 한다. 타렌툼은 티베르 강변의 캄푸스 마르티우스 즉 마르스 평야에 속한 곳인데 타렌툼에서 제사와 경기가 열려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 마르스 평야는 로마 시와 티베르 강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로마의 건국 시조인 로물루스가 하늘로 승천한 곳이며 로마인들이 종교행사를 위해 모이던 신성한 곳이었다.

5세기 역사가 조시무스에 의하면 백년마다 개최되던 이 타렌툼 축전은 발레리우스 가문의 아이들이 역병에 걸려 죽을 지경에 처했다가 타렌툼 근처 티베르 강물을 먹고 살아나 발레리우스 가문이 디스 파테르 신과 프로세르피나 여신에게 감사제를 사흘 밤 연달아 올리던 데서부터 기원하였다고 한다. 아이들의 아버지 발레수스 발세이수스는 그 후 자신의 이름을 마네스 발레리우스 타렌티누스로 바꾸었다. 마네스는 하계신을 의미하며 발레리우스는 건강하다는 뜻의 발레레valere’에서 왔다. 이 일은 왕정기 말에 있었는데 공화정기 초 발레리우스 가문 출신의 정치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가 로마에 전염병이 발병하자 검은 황소와 암소를 디스 파테르 신과 프로세르피나 여신에게 바치고 신들을 위한 경기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로마 인민들의 생명을 역병에서 구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백여 년 후 전쟁과 역병이 발생하였을 때 로마 원로원이 주체가 되어 타렌툼에서 제사를 올리고 경기대회를 개최하여 다시 재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타렌툼 축전의 기원에 대한 다른 설명도 있는데 거만왕 타르퀴니우스 때 무서운 역병이 돌아 모든 임신한 여성들이 사산하는 일이 벌어지자 새끼를 낳지 못하는 암소들을 바쳐 하계신의 분노를 달랬다는 것이다. 제사 행사에 경기대회가 더해져 이 축제 이름을 황소 경기대회’(ludi taurii)라 하였다. 이 축전은 하계신들이 시내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플라미니우스 경기장에서 열렸다. 플라미니우스 경기장도 타렌툼처럼 마르스 평야 끄트머리에 있었다. 이 타우리 축전은 타렌툼 축전과 동일시되었다.

타렘툼 축전은 타우리 축전처럼 역병의 재난을 막기 위해 하계신에게 제사지내던 것과 연관이 있었다. 매년 개최되었던 것도 아니고 정해진 날짜도 없었으며 포에니 전쟁과 같은 국가의 비상사태 시에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 세기에 한 번씩 백년제가 행해졌다는 것은 아우구스투스 때 만들어진 허구일 가능성이 많다.

 

6. 백년제

 

뛰어난 정치가 아우구스투스가 BCE 17년에 거행한 세기제 즉 백년제에 관해서는 축전 후 축전 준비와 그 진행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비석이 세워졌는데 전문은 아니지만 그 일부 텍스트가 판독이 가능하여 우리는 아우구스투스 백년제에 대한 제법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다. 백년제를 위해 15인위원회(quindecimviri)가 조직되었는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그 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이들은 사제단의 자격으로 신탁서를 보고 축전 시기를 확정하였을 뿐 아니라 축전의 준비와 집행을 맡았다. 마치 오늘날 올림픽 조직위원회와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백년제 축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국가가 기획하고 예산을 댄 행사였다.

축전은 531일 밤 마르스 평야에서 아우구스투스가 운명의 여신들(Moerae)에게 아홉 마리의 암양과 아홉 마리의 암염소를 번제로 바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다음날인 61일 낮에는 카피톨 언덕에서 유피테르 신에게 소를 두 마리 바치는 제사가 있었고 밤에는 마르스 평야에서 출산의 여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이 여신에게는 모두 세 종류의 케이크를 9개씩 올렸다. 다음날 낮에는 유노 여신에게 암소 두 마리를 올려 제사를 지냈으며 그 날 밤에는 지모신(Terra Mater)에게 제사를 올렸다. 제물로는 새끼를 밴 암퇘지 한 마리를 바쳤고 63일 낮에는 팔라틴 언덕에서 아폴로 신과 디아나 여신에게 세 종류의 케이크를 아홉 개씩 올렸다.

25세 이상 된 기혼여성들 가운데서 뽑힌 110명의 여성들이 제사에 참여하였으며 또 양친이 모두 살아있는 소년소녀들로 합창단을 구성하여 이들이 찬가를 불렀다. 소년소녀들이 부른 백년제찬가(Carmen saeculare)는 현재 그 내용이 전해진다. 시인 호라티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요청으로 작사한 것으로 아이네아스로부터 기원한 로마의 건국을 언급하며 신들이 로마인들에게 부와 영광,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을 기원하였다.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정화의식을 거쳐야 하였다. 정화용 횃불은 루스트랄리아라고 하였는데 유황과 피치를 이용하여 불을 붙였다. 정화제(purgamenta)는 모두 국가의 비용으로 마련하여 나눠주었다. 제사만 거행된 것은 아니고 제사가 열리던 마르스 평야에다 가설무대를 설치하여 공연을 하였다. 연극공연이 끝나면 전차경주도 벌어졌다.

65일부터는 7일간의 각종 경기대회가 벌어졌는데 라틴 연극, 그리스 음악극, 그리스 연극 등이 여러 곳에서 개최되었다. 612일에는 동물 사냥과 서커스 공연 그리고 가두행진이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47년에 건국 팔백년제를 거행하였고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88년에 백년제를 거행하였다. 이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팔백년제를 무시하고 아우구스투스의 백년제로부터 계산하여 백년 후에 열린 것이다.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는 다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백년제를 계승한 148년에 구백년제를 거행하였다. 아랍인으로 알려져 있는 필립푸스 황제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백년제 전통을 이어 248년에 건국 천년제를 열었다.

그런데 204년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재위 193-211) 때에 백년제가 예외적으로 열렸는데 이는 아우구스투스 라인을 계승한 것도 아니고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백년제를 계승한 것도 아니다. 내전에서 정적들을 제거하고 승리한 세베루스 황제가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선전의 수단으로 백년제를 거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세베루스 황제의 백년제에 관한 비문 기록도 전해오는데 제전의 구체적 내용은 아우구스투스 때와 거의 다르지 않다고 한다. 제전 장소를 정화하는 의식이 있었다는 것 정도가 차이일 뿐이다. 백년제가 황제들의 통치에 대한 선전수단으로 이용되었던 것은 백년제를 기념하여 발행된 주화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백년제를 거행한 황제들은 기념주화를 발행하고 황제상은 물론이고 제전을 상징하는 여러 상징들을 주화에다 새겼다. 필립푸스 황제의 주화를 살펴보자. 그 당시 로마제국은 대내외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해 있었는데 북방의 오랑캐들이 국경을 넘어 침범해오고 여러 곳에서 황제를 참칭하는 인물들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천년제는 대중들로 하여금 국가적 난관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도록 대중들의 관심을 돌리는 역할을 하였다. 필립푸스 황제가 천년제를 기념하여 발행한 주화에는 황제들의 화합(concordia augustorum)’ ‘새로운 세기(saeculum novum)’등 정치적 메시지를 전하는 명문들이 새겨졌다.

로마의 공식적인 건국기념제인 백년제는 필립푸스 황제 이후로는 더 이상 거행되지 않았다. 여러 경쟁자들과 싸워 승리하고 수도를 로마로부터 콘스탄티노플로 옮겼을 뿐 아니라 예전의 기독교 박해정책을 중단하고 친기독교적인 정책을 시행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세베루스 황제의 백년제를 이어 314년에 백년제를 거행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 치세에 백년제는 없었다. 그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 때인 348년에도 백년제는 거행되지 않았다. 로마제국이 망해가던 시기에 살았던 역사가 조시무스는 세베루스 황제의 백년제로부터 110년 뒤인 314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리키니우스 황제가 백년제를 거행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제사 행사를 소홀히 함으로써 로마가 현재처럼 쇠퇴하게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7. 결어

 

건국축제는 국가를 이루는 성원들의 단합과 정체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고대 아테네와 로마 모두 건국을 기념하는 축전을 개최하였는데 축전은 신들에 대한 제사의례를 중심으로 하여 거기에 각종 경기대회가 덧붙여 이루어졌다. 아테네의 판아테나이아 축제는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에 대한 제사를 중심으로 하였으며 로마의 건국제라 할 수 있는 백년제에서는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며 로마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였다.

그리스와 로마의 건국제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교적인 축제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로마제국이 점차 기독교화 되어감에 따라 로마의 백년제도 더 이상 개최되지 않았다. 판아테나이아 축제를 연구한 줄리아 쉬어 박사에 의하면 판아테나이아 축전은 390년 이후에는 중단되었던 것 같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칙령을 내려 모든 종류의 희생제사를 금지하였고 모든 이교신전들을 폐쇄하였다. 칙령을 어기는 자는 벌금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공식적인 금령 이전에도 제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모금하기 힘들어 희생제물이 없이 행사가 치러지기도 하였다. 아테네의 경우에는 396년 알라릭의 서고트족 침략으로 도시가 큰 훼손을 입었는데 이것도 제전의 지속에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아테나 여신의 거처이자 제사가 거행되던 파르테논 신전도 폐쇄되고 6세기 말에는 성모마리아 교회로 전용되었다. 기독교 시대의 도래로 전통적인 건국제의 전통은 소멸의 길을 운명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건국제 특히 종교적 성격의 축제는 제사의례 참여를 통해 시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일체성을 고양함으로써 국가공동체의 유지에 큰 기여를 하였다. 판아테나이아 축제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판아테나이아 축제는 모든’(pan) 아테네 시민이 참여하는 축제였다. 아테네는 아테네인들이 자신들이 아테네 시민임을 자각하도록 시민만이 참여할 수 있는 경기를 정하고 또 아테네 시민이 개인이 아니라 부족이나 데메(deme) 대표로 경기에 출전하도록 하는 등의 장치를 통하여 정체성 확립을 도왔다. 판아테나이 축제 같은 건국제제가 소멸하여 갔다는 것은 새로운 정체성의 확립이 필요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세 유럽은 이러한 예전의 정체성의 공백을 메꾸고 새로운 정체성을 창출해 내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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