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구처기와 칭기스칸
이재석(상생문화연구소)
2022년 증산도 후천선문화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구처기와 칭기스칸
서언
1. 구처기는 누구인가
1) 전진도란
2) 곤륜산인가, 곤유산인가
3) 백운관
2. 구처기의 사상
1) 삼교합일
2) 성선
3) 선성후명
4) 금욕주의
3. 구처기 관련 저작
1) 『반계집磻溪集』
2) 『명도집鳴道集』
3) 『대단직지大丹直指』
4) 『섭생소식론攝生消息論』
5) 「장춘진인규방長春眞人規榜」
6) 「구조수훈문邱祖垂訓文」
7) 『장춘진인서유기長春眞人西遊記』
8) 『현풍경회록玄風慶會錄』
9) 「장춘진인본행비長春眞人本行碑」
4. 『원사』 「구처기전」 번역
서언
『도전道典』 1장 10절에는 ‘명나라 주장춘이 전한 상제님 강세 소식’이란 제목으로 주장춘의 「진인도통연계眞人道通聯系」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의 근원은 곤륜산崑崙山이니 곤륜산의 본래 이름은 수미산須彌山이라. 곤륜산의 제1맥이 동해 쪽으로 뻗어 나가 유발산儒拔山을 일으키고 유발산이 니구산尼丘山을 낳아 72봉을 맺으니라. 공자가 니구산 정기를 타고 태어나 72봉의 기운으로 그의 제자 72현賢이 배출되니라. 곤륜산의 제2맥이 불수산佛秀山을 낳고 불수산이 석정산釋定山을 일으켜 이곳에 499봉이 솟으니라. 석가모니가 석정산의 영기靈氣를 타고 왔나니 그의 도통제자 499명이 나오니라. 곤륜산의 제3맥이 동방으로 쭉 뻗어 백두산白頭山에 맺히고 그 맥이 다시 남으로 뻗어 금강산을 수놓아 일만 이천 봉이 솟았느니라. 그리하여 이 기운을 타고 증산甑山께서 오시어 천지의 문호인 모악산母岳山 아래에서 결실의 추수진리(熬道)를 열어 주시나니 그 도道는 ‘모든 진리를 완성’시키는 열매가 되리라. 후에 그분의 도문에서 금강산의 정기에 응해 일만 이천 명의 도통군자道通君子가 출세하리라.(『도전』 1:4~10)
원문은 이러하다.
山之祖宗崑崙山은 原名이 須彌山也라
崑崙山第一支脈이 入于東海하여 生儒拔山하고 儒拔山이 生尼丘山하여 起脈七十二峯하니 故로 生孔子하여 七十二名道通也라.
崑崙山第二支脈이 入于西海하여 生佛秀山하고 佛秀山이 生釋定山하여 起脈四百九十九峯하니 故로 釋迦牟尼는 四百九十九名道通也.
崑崙山第三支脈이 入于東海하여 生白頭山하고 白頭山이 生金剛山하여 起脈一萬二千峯하니 故로 生甑山하여 天地門戶母岳山下에 道出於熬也라. 故로 一萬二千名道通也라.
산의 조종인 곤륜산에서 비롯되어 각기 지맥을 타고 유교의 창시자 공자와,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 그리고 구원의 진인인 증산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글의 저자로 알려진 주장춘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주장춘이 누구인가에 대해서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연구를 하고 있으나 아직 확실한 결론이 내려진 것은 아니다. 현재 가장 유력한 설은 주장춘을 구처기로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구처기의 도호가 장춘진인이라 구장춘이라 불리고, 또 유ㆍ불ㆍ도 삼교일치 사상을 가지고 있으며, 칭기스칸의 부름을 받고 72세의 나이로 2년 4개월 동안 3만리의 여정을 다녀와서 지리에도 매우 밝았기 때문이다.
이에 우선 구처기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높이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리라 보고 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구처기는 누구인가
구처기(1148~1227)는 왕중양의 제자로서 북칠진北七眞(혹은 전진칠자全眞七子)의 한 사람이다. 전진도의 5대 장문인이며, 훗날 ‘만리부조萬里赴詔, 일언지살一言止殺, 비천민인悲天憫人’을 한 용문파龍門派의 조사祖師가 된다.
구처기는 반계磻溪에서 6년을 지냈는데, 고행을 하면서 일심으로 수행하고 각고의 노력으로 독서를 하였다. 그가 본 책은 유, 불, 도 삼교의 경전 이외에도 진문秦文과 한부漢賦, 당시唐詩와 송사宋詞 등 역대의 이름난 문학서를 섭렵하였고, 『주역』에 대해서도 깊은 연구를 하였다. 그는 시문 짓기를 좋아하여 『반계집』과 『명도집』이라는 시문집을 남겼으며, 서법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1219년(기묘년) 겨울에 칭기스칸(1167~1227)은 내만국乃蠻國으로부터 근신 찰팔아札八兒, 유중록劉仲祿에게 조서를 가지고 구처기를 데려오라고 명했다.
그들은 내주萊州(지금의 산동성 액현掖縣)로 가서, 구처기에게 예를 다하여 서역으로 가서 칭기스칸을 뵈러 가자고 요청하였다.
구처기가 주저하는 사이에 유중록은 다음과 같이 간곡하게 말하였다.
선생님(구처기를 말함)의 명성은 온 천하에서 존중합니다. 그래서 황제(칭기스칸)께서 특별히 조서를 내려서 산과 바다를 넘고 시간에 제한을 두지 말고 반드시 선생님을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師躊躇間, 仲祿曰: “師名重四海. 皇帝特詔, 仲祿踰越山海, 不限歲月, 期必致之.(왕국유王國維, 『장춘진인서유기주長春眞人西遊記註』(상))
이듬해 정월, 구처기는 제자 18인을 거느리고 호천관昊天觀을 출발하여 연경燕京(지금의 북경) 등지에서 많은 시간을 머물렀다. 전진교의 7대 장문인인 이지상李志常(1193~1256)이 펴낸 『장춘진인서유기長春眞人西遊記』의 기록에 따르면, 구처기의 서행西行에 동행한 제자 18인은 조도견趙道堅, 송도안宋道安, 하지성夏志誠, 송덕방宋德方, 맹지온孟志溫, 하지견何志堅, 반덕충潘德沖, 윤지평尹志平, 왕지명王志明, 어지가於志可, 국지원鞠志圓, 양지정楊志靜, 기지청綦志淸, 장지소張志素, 손지견孫志堅, 정지수鄭志脩, 장지원張志遠, 이지상李志常을 말한다. 훗날 전진용문파에서는 그들을 ‘십팔진인十八眞人’으로 존칭한다.
1221년 봄에, 선덕宣德(지금의 하북성 선화宣化)를 떠나서 막북漠北으로 서행하였다. 그 해 11월에 사마르칸트에 이르고, 이듬해 4월에 대설산大雪山(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힌두쿠시 산)에서 칭기스칸을 만났다. 칭기스칸이 장생의 도를 물으니 구처기는 다음과 같은 명언으로 대답하였다.
삶을 지키는 방법은 있지만 영원히 살 수 있게 하는 약은 없습니다.
有衛生之道而無養生之藥(왕국유王國維, 『장춘진인서유기주長春眞人西遊記註』(상), 58쪽)
구처기는 칭기스칸에게 이 세상에는 영원히 죽지 않는 방법은 없지만 청심과욕을 하고 적덕행선을 하면 수명을 늘일 수 있다고 대답했다.
명대 송렴宋濂(1310~1381)이 편찬한 『원사元史』 「구처기전丘處機傳」에서는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장생구시長生久視의 방법을 물었을 때는 청심과욕淸心寡欲을 요체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問長生久視之道, 則告以淸心寡欲爲要.
또 칭기스칸은 구처기를 존중하여 ‘신선’이란 존칭을 하사하였다.
야율진경耶律晉卿(진경은 야율초재의 자)은 막 시랑이 되었는데 구처기의 말을 기록하여 『현풍경회록』을 편찬하였다. 칭기스칸이 모두 그 책을 옳다고 여기고 진해鎭海에게 물었다. “진인을 무엇으로 호칭해야 하오?” 진회가 아뢰었다. “어떤 이는 그를 높여 ‘부사父師’라 하고, 어떤 이는 ‘진인眞人’이라 하고, 어떤 이는 ‘신선神仙’이라고 합니다.” 칭기스칸이 말하였다. “지금부터는 그를 신선으로 부르도록 하라.”
耶律晉卿方爲侍郞, 錄其言以爲『玄風慶會錄』, 皇帝皆信而用之, 問鎭海曰: “眞人當以何爲號?” 鎭海奏曰: “有人尊之曰父師者, 有曰眞人者, 有曰神仙者.” 上曰: “從今已往, 可以神仙號之.”(진지안秦志安, 『금련정종기金蓮正宗記』)
칭기스칸은 장생불로의 방법을 못하였지만 구처기와 전진도에 대해서는 매우 존숭하였고, 구처기를 ‘천하출가인天下出家人’의 우두머리로 임명하고 전진도를 중국 도교의 정종正宗으로 인정하였다.
그 해 10월에 구처기는 사마르칸트를 떠나서 동쪽으로 반환 여정에 올랐으며, 1223년 가을에 선덕으로 돌아왔다.
칭기스칸이 구처기의 도법道法을 찾은 목적은 진시황과 한 무제가 선약仙藥인 불로초不老草를 찾은 것과 마찬가지로 장생불로를 위한 것이지만, 이 목적은 진실로 실현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칭기스칸이 전진도를 존숭한 까닭은 중국 수도자의 풍골과 학식을 우러러 보기도 하였지만 전진도 자체의 가르침이 통치자의 필요에 부합하였기 때문이었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칭기스칸은 구처기를 존중하여 ‘신선神仙’이라 불렀으며, 그의 사후인 1269년(지원至元 6)에 원나라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1215~1294)는 그를 ‘장춘연도주교진인長春演道主敎眞人’으로 봉하였으므로 세상에서는 ‘장춘진인長春眞人’이라 부른다. 1310년(지대至大 3)에 무종武宗 카이산(1281~1311)은 ‘장춘전덕신화명응진군長春全德神化明應眞君’으로 추봉하여 존숭하였다.
구처기의 성 ‘구丘’는 ‘구邱’로 쓰기도 한다. 이것은 원래 ‘대구大丘’를 공자의 이름인 ‘구丘’를 피하기 위해 의미를 나타내는 ‘우부방(阝)’을 덧붙인 ‘대구大邱’로 쓰는 것과 같다.
구처기의 서행 노선
1) 전진도란
(1) 창교자
전진도는 전진교라고도 하며, ‘오조칠진五祖七眞’의 조사祖師가 있다. 오조의 처음은 동화제군東華帝君 왕현보王玄甫이고, 다음은 종리권鍾離權, 여동빈呂洞賓, 유해섬劉海蟾, 왕중양王重陽 순으로 이어졌다. 칠진은 전진칠자를 말한다.
창교자는 왕중양王重陽(1112~1170)이다. 그는 ‘삼교원융三敎圓融’, ‘식심견성識心見性’, ‘독전기진獨全其眞’을 종지로 삼아 제자들과 함께 전진도를 창건하였다. 왕중양은 유ㆍ불ㆍ도의 삼교합일을 주창하여 세속의 윤리강상, 충효절의를 중시하였는데, 이것이 통치의 필요성에 부합하였기 때문에 전진도가 원나라 때 크게 성한 것이다. 왕중양은 문등文登, 영해寧海, 복산福山, 등주登州, 내주萊州 등지에서 삼교칠보회三敎七寶會, 삼교금련회三敎金蓮會, 삼교삼광회三敎三光會, 삼교옥화회三敎玉華會, 삼교평등회三敎平等會 등 일반인 도교 모임을 조직하여 전도설법傳道說法하였는데, 이 명칭들에는 모두 ‘삼교’란 말이 들어 있다.
구처기는 전진도의 발전에 매우 현저한 공적을 세웠다. 그래서 그를 창교자 왕중양과 함께 거론한다. 전진칠자가 모두 세상을 떠난 후에도 구처기의 문도가 가장 흥성하여 그를 조사로 모시는 용문파龍門派가 명청 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진도의 주류가 되었다.
(2) 전진의 뜻
전진도의 교의敎義는 ‘전진’이라는 두 글자에 집중적으로 체현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있는데, 어떤 이는 ‘진성眞性’을 보존한다는 뜻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정精, 기氣, 신神’ 세 가지를 온전하게 하는 것이라 하고, 다른 이는 개인이 수양하는 ‘진공眞功’과 세상을 구제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진행眞行’을 겸비해서 둘을 온전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전진도의 창교자들은 진공과 진행을 겸비하여 온전하게 하는 것을 매우 강조하였다.
내단학에 정통한 송말원초의 도사 이도순李道純은 「전진활법全眞活法」에서 ‘전진全眞’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연설명하였다.
이른바 전진이란 그 본래의 참됨을 온전히 하는 것이다. 정精을 온전히 하고, 기氣를 온전히 하고, 신神을 온전히 해야 비로소 전진全眞이라고 한다. 조금이라도 흠결이 있으면 온전하지 않은 것이고, 조금이라도 오염이 있으면 참되지 않은 것이다.
所謂全眞者, 全其本眞也. 全精、全氣、全神, 方謂之全眞. 才有欠缺, 便不全也; 才有點汚, 便不眞也.(『중화집中和集』)
‘진공’은 수행을 이루기 위하여 욕됨을 참는 ‘인욕함구忍辱含垢’가 중요 내용이고, ‘진행’은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고기이인苦己利人’을 말한다. 곧 절대적인 금욕주의를 실행하여 생활 욕구를 최저한도로 내리고 고행을 하는 것이다.
(3) 전진칠자
구처기는 마옥馬鈺(1123~1183), 담처단譚處端(1123~1185), 유처현劉處玄(1147~1203), 왕처일王處一(1142~1217), 학대통郝大通(1149~1212), 손불이孫不二(1119~1182)와 함께 왕중양王重陽(1112~1170) 진인眞人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이 일곱 명을 전진칠자全眞七子 혹은 북칠진北七眞이라 한다. 이들은 훗날 각기 종파를 열었는데 다음과 같다.
① 우선파遇仙派 단양진군丹陽眞君 마옥馬鈺
② 남무파南無派 장진진군長眞眞君 담처단譚處端
③ 수산파隨山派 장생진군長生眞君 유처현劉處玄
④ 용문파龍門派 장춘진군長春眞君 구처기丘處機
⑤ 유산파崳山派 옥양진군玉陽眞君 왕처일王處一
⑥ 화산파華山派 태고진군太古眞君 학대통郝大通
⑦ 청정파淸淨派 청정진군淸靜眞君 손불이孫不二
(4) 전진도의 역대 장교인(장문인)
전진교 역대 장문
① 왕철王嚞(1112~1170): 도호가 중양자重陽子이므로 세칭 왕중양이라 한다.
② 마옥馬鈺(1123~1183): 도호가 단양자丹陽子이므로 세칭 마단양馬丹陽이라 한다.
③ 담처단譚處端: 도호는 장진자長眞子.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장진운수온덕진인長眞雲水蘊德眞人라는 도호를 내려 세칭 장진진인長眞眞人이라 한다.
④ 유처현劉處玄: 호는 장생자長生子.
⑤ 구처기丘處機: 도호는 장춘자長春子.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그를 ‘장춘연도주교진인長春演道主敎眞人’으로 추봉하였다.
⑥ 윤지평尹志平(1169~1251)
⑦ 이지상李志常(1193~1256)
⑧ 왕지탄王志坦: 도호는 순화자淳和子.
⑨ 장지경張志敬: 도호는 성명진인誠明眞人.
⑩ 기지성祁志誠(1219~1293): 도호는,동명자洞明子.
⑪ 장지천張志遷 도호는 현일玄逸..
⑫ 묘도일苗道一: 도호는 응화凝和.
⑬ 손덕욱孫德彧: 도호는 개현開玄.
⑭ 난도원蘭道元
⑮ 손리도孫履道
⑯ 묘도일苗道一: 다시 장교를 함.
⑰ 완안덕명完顔德明: 도호는 중현重玄.
(5) 주요 경전
전진도의 주요 경전은 도교만이 아니라 불교와 유교의 경전도 함께 포함되어 있다.
① 도교 경전
『도덕경道德經』: 『노자老子』를 말하며, 춘추시대 말기의 사상가 노자가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자』는 춘추전국시대 도가학파의 대표 저작이면서 도교에서 높이 받드는 경전이다. 당唐 나라 현종玄宗 때는 더욱 중시되어 『도덕진경道德眞經』으로 불렸다.
『청정경淸靜經』: 원명은 『태상노군설상청정경太上老君說常淸靜經』이며, 『상청정경常淸靜經』이라고도 한다. 도교 연양술煉養術의 주요 저작이다. 도교에서는 태상노군太上老君(노자)이 서쪽의 곤륜산에 갔을 때 서왕모西王母를 위해서 『상청정경常淸靜經』을 말해주었는데, 선인들이 여러 갈래로 이것을 전하고 다시 삼국시대 오吳 나라의 갈현葛玄(164~244)이 기록하여 세상에 전해졌다고 한다.
『전진입교십오론全眞立敎十五論』: 왕중양王重陽(1112~1170)이 지었다. 전진도의 창교의 기본 종지가 서술되어 있고, 엄격한 수도의 계율과 규칙을 규정하였으며, 유儒 불佛 도道 삼가三家의 정화를 융합한 책으로 전진도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경전이다.
② 불교 경전
『심경心經』: 곧 『반야심경般若心經』으로서 『대반야바라밀다심경大般若波羅蜜多心經』,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이라고도 한다. 불교의 핵심적인 이치인 반야바라밀다를 간결하고 분명하게 요약한 핵심 불교 경전이다.
③ 유교 경전
『효경孝經』: 효의 원칙과 규범을 수록한 유교 경전이다.
2) 곤륜산인가, 곤유산인가
『원사』의 목판본으로는 『무영전이십사사武英殿二十四史』본과 『이조당사고전서회요摛藻堂四庫全書薈要』본이 있다. 그런데 이 두 본 모두 구처기가 전진도를 배우러 간 곳을 ‘곤륜산崑崙山’으로 표기하고 있다. 과연 그러한가?
곤륜산은 티베트 고원의 북부를 따라 서쪽으로 뻗어있는 산이다. 또 도교에서는 서왕모西王母가 살고 있는 성산聖山으로 여긴다. 그런데 구처기는 산동 사람이기 때문에 어려서 그 먼 곳까지 갈 수가 없었고, 스승인 왕중양도 그곳에 갔다는 기록이 없다. 그렇다면 곤륜산이 아니란 말인가? 산동에는 ‘곤유산崑嵛山’이 있다. 곤유산은 도교의 명산으로서 전진교의 발원지이다. 지금의 산동성 위해威海 문등구文登區와 연대시煙臺市 모평구牟平區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장백산계長白山系와 노산산맥嶗山山脈에 속한다. 이 산에는 ‘해상제산지조海上諸山之祖’라는 미칭이 있다. 산에는 구처기의 수서석비手書石碑가 남아 있으며, 마고麻姑의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곤륜崑崙’의 ‘륜崙’ 자와 ‘곤유崑嵛’의 ‘유嵛’ 자의 형체가 비슷하여 판각을 한 사람이 혼동을 일으켜 잘못 새긴 것이다.
『이조당사고전서회요摛藻堂四庫全書薈要』본
『원사』의 ‘곤륜산’ 표기
『무영전이십사사武英殿二十四史』본
『원사』의 ‘곤륜산’ 표기
3) 백운관
백운관白雲觀은 구처기가 말년에 머물렀던 도관이다. 백운관은 원래 당나라 현종玄宗이 노자老子를 제사하기 위하여 지은 천장관天長觀에서 비롯된다. 금나라 때 화재로 거의 전부 소실되었다가 1174년(대정大定 14)에 중수되었으며, 금나라 세종은 ‘십방천장관十方天長觀’이란 이름을 내려주었다. 다시 화재로 인해 소실되었다가 1203년(태화泰和 3)에 다시 중수하고 이름을 ‘태극궁太極宮’으로 바꾸었다. 그러다가 1215년(정우貞佑 2)에 금나라의 국세가 쇠퇴해져 수도를 개봉開封으로 옮기면서 태극궁도 점차 황폐해졌다.
원나라 초기에 구처기가 서역의 대설산에서 칭기스칸을 만나고 연경으로 돌아왔는데, 이 때 그에게 태극궁이 하사되었다. 그러나 당시에 너무 초라했으므로 구처기는 제자 왕지근王志謹(1177~1263)에게 새롭게 조성하도록 명하였고 3년 만에 면모를 일신시켰다. 1227년 칭기스칸은 조칙을 내려 태극궁을 ‘장춘관長春觀’으로 개명하게 하였다. 그 해 7월에 구처기는 장춘관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제자 윤지평尹志平이 장춘관에 처순당處順堂을 건립하여 구처기의 유체를 보관하였는데, 이리하여 백운관은 점차 전진용문파의 조정祖庭이 되었다. 명대 초기에 처순당을 중심으로 중건되고 이름도 백운관으로 바뀌었다. 청대 초기에 왕상월王常月이 방장方丈으로 와서 대규모 중수를 진행하고 공개적으로 계율을 전수하였는데, 계를 받은 용문파 제자들이 그 교법을 가지고 각지의 도관에 널리 전하였다. 오늘날 전진교도 대부분은 용문파에 속하며, 백운관은 전진도제일총림全眞道第一叢林이 되었다.
백운관에는 영관전靈官殿ㆍ종고루鍾鼓樓ㆍ삼관전三官殿ㆍ재신전財神殿ㆍ옥황전玉皇殿ㆍ구고전救苦殿ㆍ약왕전葯王殿ㆍ노율당老律堂ㆍ구조전邱祖殿ㆍ삼청사어전三淸四御殿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2. 구처기의 사상
1) 삼교합일
육조 시기 이후로, 유 불 도 삼교의 합일은 점차 사상계의 주요 조류가 되었으며, 왕중양이 전진도를 창립할 때도 삼교합일을 창교의 종지로 삼았다. 구처기 역시 이것을 계승하여 삼교가 근원이 같음을 주장하였다.
유, 불, 도는 세 교조에 근원하고, 천 명 성인의 유래는 고금이 같다.
儒釋道源三敎祖, 由來千聖古今同.(『반계집磻溪集』 「증유사로贈劉師魯」)
또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삼교의 문인을 만나면 모름지기 평등하게 대해야 하며, 태만하게 해서는 안 된다.
見三敎門人, 須當平待, 不得怠慢.(「장춘진인규방長春眞人規榜」)
2) 성선
장생長生과 성선成仙 곧 오래 살고 신선이 되는 것은 도교의 기본 신앙으로서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근본적인 표지이다. 이전 도교는 수련을 통해 형形(몸)와 신神(정신)이 모두 죽지 않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 신앙은 육체와 정신이 함께 장존하는 이른바 ‘백일비승白日飛昇’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전진도는 육체의 불사를 추구하지 않고 ‘진성眞性’의 해탈과 ‘양신陽神’의 승천만을 추구하였다. 사람의 육체는 사멸하지만 사람의 진성 혹은 양신만이 장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이것은 불교의 ‘열반涅槃’과 비슷하다. 그들이 말하는 진성, 일령一靈, 원신元神, 원성元性, 진심眞心 등의 개념은 불교에서 근원한다. 그래서 사람의 육체를 질곡으로 보고 그것을 훼멸시켜서 진성, 양신의 빠른 해탈을 추구하였다. 그래서 구처기는 육체를 ‘악취 나는 가죽주머니’란 뜻의 ‘취피낭臭皮囊’, ‘썩어문드러진 고기’란 뜻의 ‘난육爛肉’이라 하였다. 또 전진도는 선종禪宗의 견성성불見性成佛 설에 영향을 받아 내성內省 공부를 잘하기만 하면 홀연히 진성을 보고 생사를 떠나 양신의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구처기는 이렇게 주장하였다.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게 하면 스스로 주인이 되고, 마음에 사물이 없게 하면 곧 신성이요 부처라.
一念無生卽自由, 心頭無物卽仙佛.
3) 선성후명
전진도 내단술內丹術의 연원은 종리권과 여동빈이며, 성명쌍수性命雙修를 기본 내용으로 하고, 성이 먼저고 명이 나중이라는 ‘선성후명先性後命’을 제창하여 성을 주主로 삼았다. 선성후명이란 먼저 마음을 거두고 생각을 내리고, 환경에 대해 오염되지 않는 명심견성明心見性 공부를 하여 마음을 정하고 생각을 고요하게 한 후에 정좌靜坐하여 조식調息한다. 그러고 나서 종려파의 전통 내단법 순서에 따라 정精을 단련하여 기氣를 변화시키고, 기를 단련하여 신神을 변화시키고, 신을 단련하여 허虛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다.
구처기는 이렇게 단언하였다.
우리 종파는 오직 견성見性을 귀중하게 여기고 수화水火의 배합은 그 다음이다.
吾宗惟貴見性, 水火配合其次也.(『구조어록丘祖語錄』)
‘수화배합水火配合’이란 기를 수련하고 명을 닦는 것을 말한다. 또 구처기는, 자기 종파의 내단공은 명술命術이 3할, 성학性學이 7할이라 말하였으며, 『대단직지大丹直指』의 제9절 ‘단공’ 편도 앞의 세 절은 명술을, 뒤의 여섯 절은 성학을 다루었다.
구처기의 수련 사상은 정욕情慾을 끊는 것을 수도의 전제로 하고, 청정무위淸靜無爲를 수행의 요지로 삼았다.
4) 금욕주의
전진도는 처음부터 출가자에게 암자에 머물며 수행하게 하였고, 거주 조건은 최대한 검박한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구처기도 이러한 수행을 하였다.
서쪽으로 봉상鳳翔으로 가서 반계의 강태공이 낚싯대를 드리운 곳에서 걸식을 하며, 수마와 싸우고 잡념을 없애며 전후 7년 동안 갈빗대가 자리에 닿지 않았고, 도롱이 하나와 삿갓 하나로 춥거나 더워도 변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사의선생蓑衣先生’이라 불렀다.
西遊鳳翔, 乞食于磻溪太公垂釣之所, 戰睡魔, 除雜念, 前後七載, 肋不占席, 一蓑一笠, 雖寒暑不變也, 人呼爲‘蓑衣先生’.(진지안秦志安, 『금련정종기金蓮正宗記』)
이로 볼 때, 구처기가 수행을 위해 얼마나 백절불굴의 고행을 하였는지 잘 알 수 있다. 『금련정종기金蓮正宗記』에서 왕중양과 전진칠자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인데, 금련은 ‘칠타금련七朵金蓮’ 곧 ‘일곱 송이 황금연꽃’란 뜻으로 전진칠자를 가리킨다.
이와 유사한 기록이 원대의 전진도 도사 사서섬謝西蟾과 유지현劉志玄이 함께 1327년(태정泰定 4)에 편찬한 『금련정종선원상전金蓮正宗仙源像傳』(『전진정종선원상전全眞正宗仙源像傳全眞正宗仙源像傳』이라고도 함)에도 나온다.
갑자년 가을에, 반계에 들어가 동굴에 거처하고, 매일 구걸하여 한 끼만 먹었으며, 도롱이 하나만 걸치고 다니니 사람들이 그를 ‘사의선생簑衣先生’이라 불렀으며, 주야로 잠을 자지 않은 햇수가 6년이었다. 다시 농주 용문산에서 은거하였는데, 고행을 반계에 있을 때처럼 하니, 먼곳의 도사들이 모두 그를 의지하였다.
歲甲午秋,乃入磻溪穴居,日乞一食,行一簑,人謂之簑衣先生,晝夜不寐者六年。復隱隴州龍門山,苦行如磻溪時,遠方學者咸依之。(『금련정종선원상전金蓮正宗仙源像傳』)
구처기는 또 ‘청정淸靜’과 ‘염담恬淡’을 강조하였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고, 머무는 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음란한 소리와 여색을 버리고 청정淸靜을 즐거움으로 여기며, 재미를 물리치고 염담恬淡을 아름다움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집착을 가지면 도덕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눈이 색깔을 보고, 귀가 소리를 듣고, 입이 맛을 보고, 성性이 정情을 쫓아가면 그 사람의 기를 흐트러뜨릴 것입니다.
學道之人, 以此之故, 世人愛處不愛, 世人住處不住. 去聲色以淸靜爲娛; 屛滋味以恬淡爲美. 但有執着, 不名道德也. 眼見乎色, 耳聽乎聲, 口嗜乎味, 性逐乎情, 則散其氣.
(『현풍경회록玄風慶會錄』)
출가하여 도를 배우는 사람이 좋지 않은 옷과 음식을 먹고 재화를 쌓아두지 않는 것은 몸을 해치고 복을 줄일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도를 닦는 사람은 음식과 거처, 보물과 재화가 역시 분수에 따라야 하며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出家學道之人, 惡衣惡食, 不積貨財, 恐害身損福故也. 在家修道之人, 飮食居處, 珍玩貨財, 亦當依分, 不宜過差也.(『현풍경회록玄風慶會錄』)
결국 분수를 지키지 않으면 기가 흩어지게 되고, 기가 흩어지면 몸이 쇠약해져 일찍 죽게 되고, 죽은 뒤에는 지옥에 빠져 귀신이 된다고 하였다.
5) 구세제민
전진도는 난세 속에서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구제하는데 적극적인 행동을 한 종파이며, 구처기는 특히 적극적인 활동을 한 인물이었다. 청의 건륭제는 북경 백운관白雲觀 내의 구조전丘祖殿에 다음과 같은 대련對聯을 남겼다.
만고의 장생에는 수도로 비결을 구하지 않았고, 말 한마디로 살육을 그치게 하였으니 비로소 세상을 구제하는데 기이한 공이 있음을 알겠노라.
萬古長生, 不用餐霞求祕訣; 一言止殺, 始知濟世有奇功.
이것은 구처기의 구세제민救世濟民에 대해 지극히 타당하게 평가한 말이다. 구처기는 1220년 산북山北에 머물렀을 때 칭기스칸에게 사람을 먼저 보내 표를 올려 자신을 불러준 데 대한 감사의 뜻을 전하고 아울러 살육을 멈추어야 한다(止殺)고 간절하게 권유하였다.
칭기스칸을 만났을 때는 한창 정벌 전쟁 중이었는데, 구처기는 치세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구처기는,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음에 있다고 늘 말하였다. 치세를 이루는 방도를 물었을 때는 경천애민敬天愛民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處機每言欲一天下者, 必在乎不嗜殺人. 及問爲治之方, 則對以敬天愛民爲本.(『원사元史』 「구처기전丘處機傳」)
3. 구처기 관련 저작
1) 『반계집磻溪集』: 구처기가 반계磻溪에 살면서 도를 배웠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구처기는 1174년(대정大定 14)에 반계에서 6년 동안 혈거 생활을 하였는데,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그의 제자가 금나라 말에 모아서 간행하였는데, 시사 470여 편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구처기의 생애 및 사상을 연구하는데 제일차자료가 된다. 권1에는 칠언율시七言律詩를, 권2에는 칠언절구七言絶句를 모아 놓았고, 권3에는 「청천가靑天歌」, 「음吟」 6수, 「송頌」 3수, 「보허사步虛詞」 2수, 「세종만사世宗挽詞」 1수, 「고조古調」 15수, 오언단구五言短句 3수, 오언장편五言長篇 5수가 실려 있다. 권4에는 오언율시五言律詩가, 권5에는 사詞가 수록되어 있다. 권6에도 사詞 수십 수가 실려 있다.
2) 『명도집鳴道集』: 구처기의 저작인데,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원나라 초기의 학자 진시가陳時可의 「장춘진인본행비長春眞人本行碑」는 구처기가 우화羽化한 이듬해에 지어졌는데, 이 당시에 이미 『반계집』과 『명도집』이 간행되었다. 그 후 원과 명의 전쟁 통에 없어진 것으로 본다.
3) 『대단직지大丹直指』: 구처기의 저작으로, 내단內丹의 원리 및 방법을 제시하였는데 후한 때 신선 종리권鍾離權(168~256)의 저작인 『영보필법靈寶畢法』과 오대五代 때 시견오施肩吾가 펴낸 『종려전도집鍾呂傳道集』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영보필법』은 『비전정양진인영보필법秘傳正陽眞人靈寶畢法』 또는 『종리수여공영보필법鍾離授呂公靈寶畢法』이라고도 하며, 종려금단파鍾呂金丹派가 존중하는 기본 교전으로서 후한 말기와 삼국시대 도가의 교리를 서술하여 송원 이후 내단학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종려전도집』은 『진선전도집眞仙傳道集』 또는 『종려전도기鍾呂傳道記』라고도 하며, 주로 종리권과 여동빈이 수도에 대해 문답하는 방식으로 엮어졌다. 천인합일天人合一과 음양오행의 사상을 수도 이론에 융회 관통시키고 정精ㆍ기氣ㆍ신神의 통합 수련을 강조하였으며, 당나라 말기 도교 내단파內丹派의 중요 저작으로 일컬어진다.
4) 『섭생소식론攝生消息論』: 구처기가 쓴 양생학養生學 저작이다.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 말하는 양생의 뜻에 의거하고 개인의 심득을 결합하여 춘하추동 사계절의 질병 예방, 조섭調攝의 원칙과 방법에 대해 핵심적으로 설명하였으며, 특히 노년의 양생에 치중하였다.
5) 「장춘진인규방長春眞人規榜」: 장춘진인은 구처기를 가리키고, ‘규방’이란 포고한 계율을 뜻한다. 이 글은 도교 선현이 전진도 도사들에게 지켜야 할 계율을 말한 것이다.
6) 「구조수훈문邱祖垂訓文」: 구처기가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내린 글이다.
7) 『장춘진인서유기長春眞人西遊記』: 구처기의 제자 이지상李志常이 지은 것으로, 구처기 일행이 경유한 산천 및 연도에서 본 풍속과 인정을 위주로 하고 구처기의 생애를 기술하였다. 이 책은 13세기의 막북漠北과 서역西域의 역사지리 및 전진도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8) 『현풍경회록玄風慶會錄』: 1220년에 72세의 구처기는 칭기스칸의 요청을 받고 서쪽의 설산雪山 행궁으로 가서 그를 만나 서정西征을 계속하지 말 것을 건의하고, 살인을 중지하고 ‘경천애민’과 ‘청심과욕’을 강조하고 돌아왔다. 칭기스칸은 야율초재耶律楚材(1190~1244)에게 명하여 자신과 구처기의 여러 차례 한 대화를 편집하여 이 책을 만들게 하였다. ‘현玄’은 도교를 말하고, ‘풍風’은 교화를 뜻하니, ‘현풍’은 ‘도교의 교화’를 가리킨다. ‘경회慶會’는 경사스러운 모임을 말하니, 구처기와 칭기스칸의 만남을 의미한다.
9) 「장춘진인본행비長春眞人本行碑」: 진시가陳時可가 지은 역사상 최초의 구처기 전기이다. 이도겸李道謙(1219~1296)이 편찬한 『감수선원록甘水仙源錄』에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은 구처기가 우화羽化한 이듬해 지어졌는데, 『반계집』과 『명도집』은 이 당시에 간행이 되었다.
4. 『원사』 「구처기전」 번역
구처기의 전기는 『원사元史』 권202 「석로釋老」 편에 수록되어 있다. 역사적인 인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정사正史의 기록을 보아야 하므로 「구처기전丘處機傳」을 번역하였다.
구처기(1148~1227)는 등주登州 서하棲霞(지금의 산동성 연대煙臺 서하시棲霞市) 사람으로서 장춘자長春子라고 자호하였다. 어렸을 때 관상가가, 그가 훗날 신선의 최고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19세 때 구처기는 영해寧海(지금의 산동성 연대시煙臺市 모평구牟平區)의 곤유산에서 전진도를 배우고, 마옥馬鈺(1123~1183), 담처단譚處端(1123~1185), 유처현劉處玄(1147~1203), 왕처일王處一(1142~1217), 학대통郝大通(1149~1212), 손불이孫不二(1119~1182)와 함께 왕중양王重陽(1112~1170) 진인眞人을 스승으로 모셨다. 왕중양은 구처기를 한 번 보고는 큰 그릇이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금나라와 남송 말기에 두 나라에서 모두 사자를 보내 구처기를 오라고 불렀으나 구처기는 가지 않았다.
1219년(기묘년)에 태조 칭기스칸(1167~1227)은 내만국乃蠻國으로부터 근신 찰팔아札八兒, 유중록劉仲祿에게 조서를 가지고 그를 데려오라고 명했다. 구처기가 하루는 갑자기 제자에게 말하여 서둘러 행장을 차리게 하고 말하기를, “천자의 사자가 나를 부르러 왔으니, 내가 마땅히 가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과연 두 사람이 이르자, 구처기는 곧 제자 18명과 함께 가서 만났다. 이듬해 산북山北에 머물렀는데, 구처기는 사람을 먼저 보내 표를 올려 감사를 전하고 아울러 살육을 멈추어야 한다(止殺)고 간절하게 권유하였다. 그 이듬해 구처기는 길을 재촉하는 사자가 다시 오자, 이에 무주撫州로부터 출발하여 수십 나라를 지났는데 1만여 리 길이었다. 가는 동안 대개 전장에서 피를 밟고 지나가고 반란 지역에서는 도적을 피하기도 하였고, 사막에서 양식이 떨어지기도 하면서 곤유산 출발부터 4년을 지나서야 비로소 설산에 도달하였다.
늘 말을 타고 깊은 눈 속에서 전진하였으며 말 위에서 채찍으로 쌓인 눈의 깊이를 재보면 쌓인 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구처기가 칭기스칸을 알현하니 칭기스칸은 크게 기뻐하여 구처기에게 음식을 하사하고 숙소를 마련해 주었는데 아주 호화로웠다.
칭기스칸은 당시 한창 서방을 정벌 중이라 매일 전쟁을 하였다. 구처기는, 천하를 통일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음에 있다고 늘 말하였다. 치세를 이루는 방도를 물었을 때는 경천애민敬天愛民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대답하였다. 장생구시長生久視의 방법을 물었을 때는 청심과욕淸心寡欲을 요체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칭기스칸은 그의 말이 자기 생각에 부합한다고 여기고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이 선옹仙翁을 내려주어서 나의 뜻을 깨우치는구나.” 좌우의 신하에게 명하여 그의 말을 기록하게 하고 또 자식들에게 그것을 가르쳤다.
이에 호부虎符와 새서璽書를 하사하고, 구처기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그냥 ‘신선’으로 존칭하였다. 하루는 천둥이 쳤는데, 칭기스칸이 그 까닭을 묻자 구처기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천둥은 하늘의 위엄입니다. 사람의 죄는 불효보다 큰 것이 없고, 불효는 하늘을 따르지 않는 것이니 하늘의 위엄으로 천둥이 쳐서 이를 경계하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지역에 불효자가 많다고 들은 것 같은데, 폐하께서는 마땅히 하늘의 위엄을 밝히시어 백성들을 이끄소서.” 칭기스칸이 그의 말을 따랐다.
1223년(계미)에 칭기스칸이 동산에서 크게 사냥을 하였다. 그가 탄 말이 넘어지자 구처기가 청하여 말하였다. “하늘의 도는 생명을 소중히 하는데, 폐하께서는 춘추가 높으시니 사냥을 자주 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이에 칭기스칸이 사냥을 하지 않은 지가 오래 되었다. 당시 원나라 군대가 중원을 유린하였고 하남과 하북은 더욱 심했는데, 백성들은 포로가 되거나 죽임을 당하여 달아나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었다. 구처기는 연경燕京으로 돌아와서 전쟁이 없을 때 제자들에게 첩牒을 지니고 백성들을 널리 구하게 하였는데, 이 덕분에 남의 노예가 된 사람이 다시 양민이 되고, 죽을 지경에서 다시 살아난 사람이 무려 2,3만 명이나 되었다. 중원 지역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모두 구처기를 칭찬하여 말한다.
1225년(을유)에 화성이 미수尾宿를 침범하여 연경에 징조가 있음을 관찰하였다. 구처기가 기도하였더니 과연 별이 사라졌다. 1227년(정해)에 다시 가뭄이 들자 구처기가 초제醮祭를 지내 기도한 후, 사흘 뒤에 비가 내려 반드시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날 것이라고 기약하였더니 뒤에 과연 응험하였다. 칭기스칸이 명을 내려 궁명宮名을 장춘궁長春宮(지금의 백운관)으로 바꾸게 하고 사신을 보내 위문하였다. 조칙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짐은 늘 신선을 생각하고 있으니, 신선께서도 짐을 잊지 말라.”
6월에 동계東溪에서 목욕하였다. 이틀 뒤에 크게 천둥이 치면서 비가 내려서 태액지太液池의 언덕 북쪽이 무너져서 물이 전부 동호東湖로 흘러들어갔는데 물 흐르는 소리가 수 리 밖에서도 들렸고, 물고기와 자라들이 모두 달아나고 못이 마침내 말랐으며 북쪽 입구의 높은 언덕도 무너졌다. 구처기가 탄식하며 말하였다. “산이 무너지고 물이 말랐으니 내가 곧 그것들과 함께 하겠구나!” 마침내 세상을 떠나니 향년 80세였다. 그의 제자 윤지평尹志平(1169~1251) 등이 대대로 새서를 받들고 전진교를 맡았으며, 원나라 지대至大(1308~1311) 연간에 금인金印을 추가로 하사받았다.
丘處機, 登州棲霞人, 自號長春子. 兒時, 有相者謂其異日當爲神仙宗伯. 年十九, 爲全眞學於寧海之崑崙山, 與馬鈺、譚處端、劉處玄、王處一、郝大通、孫不二同師重陽王眞人. 重陽一見處機, 大器之. 金、宋之季, 俱遣使來召, 不赴.
歲己卯, 太祖自乃蠻命近臣札八兒、劉仲祿持詔求之. 處機一日忽語其徒, 使促裝, 曰: “天使來召我, 我當往.” 翌日, 二人者至, 處機乃與弟子十有八人同往見焉. 明年, 宿留山北, 先馳表謝, 拳拳以止殺爲勸. 又明年, 趣使再至, 乃發撫州, 經數十國, 爲地萬有餘里. 蓋蹀血戰場, 避寇叛域, 絶糧沙漠, 自崑崙歷四載而始達雪山. 常馬行深雪中, 馬上擧策試之, 未及積雪之半. 旣見, 太祖大悅, 賜食、設廬帳甚飭.
太祖時方西征, 日事攻戰, 處機每言欲一天下者, 必在乎不嗜殺人. 及問爲治之方, 則對以敬天愛民爲本. 問長生久視之道, 則告以淸心寡欲爲要. 太祖深契其言, 曰: “天錫仙翁, 以寤朕志.” 命左右書之, 且以訓諸子焉. 於是錫之虎符, 副以璽書, 不斥其名, 惟曰‘神仙’. 一日雷震, 太祖以問, 處機對曰: “雷, 天威也. 人罪莫大於不孝, 不孝則不順乎天, 故天威震動以警之. 似聞境內不孝者多, 陛下宜明天威, 以導有衆.” 太祖從之.
歲癸未, 太祖大獵於東山, 馬踣, 處機請曰: “天道好生, 陛下春秋高, 數畋獵, 非宜.” 太祖爲罷獵者久之. 時國兵踐蹂中原, 河南、北尤甚, 民罹俘戮, 無所逃命. 處機還燕, 使其徒持牒招求於戰伐之餘, 由是爲人奴者得復爲良, 與濱死而得更生者, 毋慮二三萬人. 中州人至今稱道之.
歲乙酉, 熒惑犯尾, 其占在燕, 處機禱之, 果退舍. 丁亥, 又爲旱禱, 期以三日雨, 當名瑞應, 已而亦驗. 有旨改賜宮名曰長春, 且遣使勞問, 制若曰: “朕常念神仙, 神仙毋忘朕也.” 六月, 浴於東溪. 越二日, 天大雷雨, 太液池岸北水入東湖, 聲聞數里, 魚鱉盡去, 池遂涸, 而北口高岸亦崩. 處機嘆曰: “山其摧乎, 池其涸乎, 吾將與之俱乎!” 遂卒, 年八十. 其徒尹志平等世奉璽書襲掌其敎, 至大間加賜金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