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논문
신시 배달의 선인 발귀리, 자부선생, 광성자
김선주(상생문화연구소)
2022년 증산도 후천선문화 국제학술대회 발표논문
신시 배달의 선인 발귀리, 자부선생, 광성자
1. 신시 배달의 수행문화
1) 신교와 제천문화
2) 홍산문화를 통해 본 신시 배달의 수행문화
3) 신선문화
2. 신시 배달의 선인들
1) 선인仙人 발귀리發貴理
2) 자부선생紫府先生
3) 광성자廣成子
국문초록
동방 한민족은 인류 초기에 태동한 시원문화인 신교神敎를 믿고 따랐다. 신교의 연원은 인류의 시원문화가 태동하던 9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문명사적으로 볼 때, 신교는 인류 원형문화의 시원이자 동서 원형종교의 모태이다. 일찍이 한민족은 천제天祭를 통해 상제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했다.
동방 한민족은 환국-배달-고조선으로 이어지는 뿌리 역사시대부터 신교를 생활문화로 삼았고, 상제를 정치와 종교 등 모든 그들 삶의 중심에 두고, 상제를 지극정성으로 받들고, 가르침에 따르는 삶을 살았다.
동방 한민족의 천제 모습은 홍산문화 제사유적군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초기 홍산문화 유적지는 현 인류문명의 근원이 되는 ‘뿌리 문화’, ‘시원 문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홍산문명을 상징하는 적석총·제단·여신묘의 제사유적군은 또한 상제문화를 대표로 하는 동이문화, 나아가서 한민족의 뿌리문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동이족으로, 곰을 토템으로 하는 웅녀족이 환국의 후손인 환웅족에 의해 문명화된 사실을 전하고 있는 『삼성기?의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다.
『삼성기?는 기원전 6,000년경 한민족사의 첫 출발점인 배달의 개국 무렵,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인 웅족이 환국의 후손인 환족의 은혜로 교화되고 문명화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기원전 3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곰토템을 지닌 웅족과 고조선(청동기 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배달국(신석기 시대)이 자리했던 곳이다. 즉 홍산문화는 환국의 후손인 배달 겨레가 중심이 되어 이룩한 문화로, 그 기반위에 단군조선이 건국되었다.
홍산문화의 주인공들은 중국 한족의 조상들이 아니라, 바로 동방 한민족의 조상, 동이東夷 배달족이 그 문화의 주체 세력인 것이다.
한국 신선 사상은 상고의 시원에 연원을 두고 끊임없이 이어진 고유 사상이다. 최치원이 풍류도라 부르는 우리나라 고유한 도의 중추는 신선사상으로, 신으로써 가르침을 베푸는 신교神敎는 신시 배달시대부터 있었다.
동방 한민족은 삼신상제님을 모시고 하늘에 계신 삼신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리며, 그 가르침대로 살았다. 그리고 수행을 통해 천지 광명의 신령한 한 기운과 하나 되는 것을 꿈꾸었다.
홍산문화에서 수행하는 사람 형상의 여신상과 남신상이 발굴되었다. 여신상이 반가부좌 모양으로 수행의 자세를 강조했다면 남신상은 같은 자세에 입을 벌린 모습을 통해 주문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이 남신상의 주문읽는 모습에서 우리는 모든 종교의 수행과 기도 문화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천상의 음악, 우주의 음악인 주문을 노래하는 수행은 인류문명의 황금시절인 환국, 배달, 고조선 시대에 보편적인 생활문화였다.
배달 시대에 선인 발귀리發貴理는 대호大皞(태호太皞, 태호복희太昊伏羲)와 동문수학하였는데, 도를 통한 후에 방저方渚와 풍산風山 지역을 유람하며 자못 명성을 얻었다. 아사달에 와서 제천행사를 보고 예식이 끝난 후에 찬송하는 글을 지었다.
자부선생紫府先生은 발귀리發貴理 선인仙人의 후손으로서 도학道學의 학문이 높았다. 그는 배달국 치우천황의 스승으로, 동서방 신선문화의 원조이다. 서쪽으로는 황제 헌원에게 신서(『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를 주어 도道를 전하였다. 이에 황제 헌원은 오늘날 중국 도가의 시조가 되었다. 동쪽으로는 고조선 국자랑의 스승인 유위자有爲子에게 학문과 도를 전하였다.
한국의 도교사에서 광성자廣成子는 중요한 인물이다. 일부 도맥에서는 이 광성자가 한국 도교의 원류라고 주장하는데, 『청학집?에 따르면 광성자에게는 명유라는 제자가 있고, 명유는 환인에게 도를 가르쳤다고 한다.
광성자廣成子는 공동산崆峒山의 석실石室에서 선도를 닦으며 살고 있었는데, 황제黃帝 헌원이 찾아와 도를 물으니 가르침을 내렸다고 한다.
광성자와 자부선생은 모두 황제 헌원에게 가르침을 준 동시대인으로 도학의 학문이 높은 선인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다.
광성자와 자부선생이 동일인으로 추정되기도 하는데, 그 근거는 황제 헌원이 광성자와 자부선인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광성자의 거처인 공동산이 청구국에 있었다는 것이다.
주요술어
신시 배달, 선인, 발귀리, 자부선생, 광성자
1. 신시 배달의 수행문화
1) 신교와 제천문화
현대 인류는 거대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 놓여 있다. 그 변화의 실체를 알고 인간 스스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정해야 하는 시기이다. 물질문명이 최고조에 달한 지금, 인류는 시원문화인 신교神敎의 중심에 있는 인간의 영성을 상실하였다. 인류 초기에 태동한 신교神敎의 원형문화도 그 근본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인류 역사의 초기 ‘황금 시대the golden age’의 삶은 동방 한민족의 신교문화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신교는 한민족의 고유종교이자 인류의 황금시절, 태고 문명의 근원이었던 시원종교이다.
동방 한민족은 정치와 종교 등 모든 삶의 중심에 삼신상제님을 두고 하늘에 계신 삼신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리며, 그 가르침대로 살았다. 그런 종교문화를 신교문화神敎文化라고 한다.
신교의 연원은 인류의 시원문화가 태동하던 9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문명사적으로 볼 때, 신교는 인류 원형문화의 시원이자 동서 원형종교의 모태이다. 신교의 핵심에는 ‘삼신을 모든 인간생활의 중심으로 삼는다’, ‘삼신상제님의 가르침으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신교는 또한 ‘풍류風流’라 불리기도 하였다. 신라의 지성 최치원崔致遠은 「난랑비서鸞郞碑序」에서 풍류의 정체를 ‘유불선 삼교를 다 포함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신령스러운 도’라고 밝혔다.
신교에서 받드는 지고의 신은 천지만물을 맡아 다스리는 통치자 하느님인 삼신상제님이다. 오래전부터 동방의 신교문화권에서는 천상의 하느님을 ‘상제님’ 혹은 ‘삼신상제님’이라 불러왔다.
일찍이 한민족은 천제天祭를 통해 상제님에 대한 신앙을 표현했다.
동방 한민족은 환국-배달-고조선으로 이어지는 뿌리 역사시대부터 신교를 생활문화로 삼았다. 그들은 상제를 정치와 종교 등 모든 그들 삶의 중심에 두고, 상제를 지극정성으로 받들고, 가르침에 따르는 삶을 살았다.
동방의 조선은 본래 신교神敎의 종주국으로 상제님과 천지신명을 함께 받들어온, 인류 제사 문화의 본고향이니라.(『도전? 1:1:6)
단군은 고조선을 건국하면서 배달의 신교문화를 그대로 계승하였으며 신교의 삼신사상을 국가 경영의 통치제도로 뿌리내렸다. 즉 신교문화를 정치 제도 속에 녹여서 신교가 모든 백성들에게 생활화, 체질화 되도록 했다. 신교 문화가 고조선에 이르러 완전히 성숙의 단계로 들어간 것이다.
고조선은 매년 하늘에 계신 삼신 상제님께 천제를 올려 상제님의 덕을 찬양하고 천제 후에는 음주와 가무를 즐겼는데, 이는 배달시대 이래 신교 문화의 오랜 전통이었다. 이 때 부른 노래가 「어아가」로서 2세 부루 단군조에 실려 있다.
3세 가륵 단군조에는 삼신을 섬기는 신관인 삼랑 을보륵이 단군에게 올린 ‘거발환’ 정신에 대한 설법이 있다. 삼신의 가르침을 깨달아 우주의 정기를 받아 광명 사상으로 세상을 널리 건질 사람이 ‘크고 환한 사람’인 거발환이다. 6세 달문 단군조에는 단군이 제후국들의 왕을 모아 구월산에서 제사지낸 기록이 실려있으며, 그 당시 신지(神誌: 관직명) 발리發理가 지은, 환웅천황과 단군왕검의 동방 문명 개창을 칭송한 「서효사」라는 노래가 실려 있다. 이 노래에서 발리는 진한의 통치를 마한과 번한이 보필하는 삼한관경제가 국가의 안정과 번영의 토대임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6세 단군 때 제천행사에 참여한 나라의 수가 큰 나라는 둘, 작은 나라는 20개, 그리고 나라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부락들은 무려 3600 개 이상이었다고 하는데, 이 기록은 동북아를 호령하는 대제국, 고조선의 면모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 외에 11세, 13세, 14세 단군조 등에서 고조선의 천제 문화에 관련된 여러 가지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11세 도해단군은 12개 명산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곳을 택해 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는 종교적 성지인 ‘소도蘇塗’를 설치하였다. 또한 소도 둘레에 박달나무를 심어, 그 중 가장 큰 나무를 골라 그 앞에 단을 쌓고 배달시대를 열었던 국조國祖 환웅천황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렇게 대내적으로 신교 문화를 번성시켰을 뿐만 아니라 도해단군은 스무 명의 선비를 뽑아 하나라로 보내 국훈國訓을 전해주었다. 이는 고조선의 사상과 철학에 대한 자부심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재위 46년 3월에는 천제를 행한 후 「천부경」을 논하고 「삼일신고」를 설했다. 이 모든 기록으로 보아 도해단군은 신교를 어느 단군들보다 특히 크게 부흥시킨 위대한 제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군왕검도 단목 터에서 백성들과 함께 삼신상제님에게 천제를 지냈으며 운사 배달신을 강화도 마리산에 보내 현존하는 한반도 내의 최고最古 제천단인 참성단을 쌓게 하였다’는 기록도 고조선이 천자의 나라였음을 보여준다. 상제님께 제를 올리는 것은 천자만의 특권이자 소임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왕을 천자로 받들고 스스로는 중국의 제후국임을 자처하여 상제님께 천제를 올릴 수 없었던 근세 조선과 단군 조선은 이런 면에서 완전히 다른 나라이다.
2) 홍산문화를 통해 본 신시 배달의 수행문화
(1) 홍산문화
문화유물은 시대를 보여주는 거울이다. 문화유물을 통해 우리는 그 시대 사람들의 정신, 문화, 제도 등을 읽을 수 있다. 곧 문화유물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다리가 된다.
동방 한민족의 천제 모습은 홍산문화 제사유적군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8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초기 홍산문화 유적지는 현 인류문명의 근원이 되는 ‘뿌리문화’, ‘시원문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1980년대 이후 우하량 일대에서의 대형제단大型祭壇, 여신묘女神廟, 돌을 쌓아 묘실을 구성하는 적석총積石塚 등이 발굴되었다. 홍산문명을 상징하는 적석총·제단·여신묘의 제사 유적군은 또한 상제문화를 대표로 하는 동이문화, 나아가서 한민족의 뿌리문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제단(단壇)과 신전(묘廟), 무덤(총塚), 그리고 옥기玉器. 흔히 청동기의 발명, 문자의 출현과 도시의 형성을 문명의 3요소라 하지만 제례문화를 보여주는, 인간의 정신세계와 관련 깊은 제단과 신전, 무덤은 이 3요소를 초월한다.
고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행사 중의 하나가 제사다. 고대인의 제사행위로는 조상에 대한 제사, 신에 대한 제사, 하늘에 대한 제사가 있다. 인간이 모시는 제사의 대상으로 여러 신이 있겠으나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신은 인간의 탄생과 안녕과 풍요를 주재하는 신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모신地母神이다. 여신은 고대 사회에서 생육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대지를 상징하고 또한 풍년을 상징하기도 한다. 지모신이야말로 가장 큰 생명력을 가진 신이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땅을 어머니로 생각하였고, 아버지를 하늘에 비유했다.
1983년에 우하량일대의 여신묘 유적에서 실물 크기의 소조 여신두상이 출토되었다. 이 여신묘는 흙에 파묻혀 있는 모습으로 발견됐다고 한다. 여신두상은 황토질 점토로 빚어 만든 소조상이다. 즉 아직 소성燒成을 하지 않은 니상泥像이다. 여신두상을 대표로 하는 소조상군은 규모가 크고 사실에 가까우면서도 신격화된 형상을 가지고 있다.
사람의 실물크기 모습에 가슴이 풍만하고 반가부좌를 틀고 있는 이 유물을 학자들은 여신상女神像으로 불렀다.
특히 중요한 것은 여신묘 유적이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신묘의 주변에 분포하는 적석총군이 발견된 점이다. 이것은 즉 여신묘를 중심으로 묘와 총이 결합한 것이다. 만약 적석총에서 지내는 묘제가 조상의 망령을 주요한 숭배의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한다면, 여신묘는 주신과 그 주신을 둘러싼 계층화된 조상의 우상군을 제사하는 것이다.
소병기는 “여신은 5500년 전의 홍산인이 진인眞人을 모방하여 조성한 신상이고, 후대인이 상상으로 창조한 신이 아니다. ‘여신’은 홍산인의 여조女祖로, 중화민족의 공동 조상이기도 하다.”라고 여신묘의 제사대상을 조상신으로 명확하게 규정하였다.
이렇게 우하량 여신상의 성질은 확실히 조상숭배의 우상으로, 중국 고대에 발달한 조상숭배에 대한 진일보한 증거가 된다. 우하량 여신묘가 발굴됨으로써 명확한 묘우廟宇의 발견 뿐만 아니라, 묘내 받드는 신상神像이 발견되어 이미 종묘의 추형雛形을 갖추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신묘는 조상의 우상이 거주하는 곳인데, 협소한 공간에서 대형 여신상을 주로 하여 동물신을 포괄하는 많은 내용물을 수용하고 있다. 이는 종묘의 기능에 회의를 갖게 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여신묘의 협소한 면적과 여신상의 거대한 규모는 부조화를 이루지만 이는 당시 종교제사에서 종묘가 지닌 봉쇄성과 신비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작은 공간에 들어가 직접 조상에 대한 제사의례를 거행하고, 신과 통할 수 있는 존재는 극소수 심지어는 ‘1인’ 뿐이다. 이는 일인독존이 중심이된 등급제의 전형적인 반영이다.
옥기는 묘장墓葬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적석총 석관에서는 수준이 뛰어난 세계 최고最古의 옥玉 제품들과 채색토기가 발굴되었다. 상등 규격의 옥기는 대형 적석총 중심 대묘 가운데에서 많이 보인다. 특히 산 정상에서 발견된 중앙 대형묘의 주인은 손에 옥 거북을 움켜쥐고 있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신과 소통할 권리를 독점한 무인巫人임을 추측할 수 있다. 인간의 대표이면서 신의 의지를 체현體現하는 사람, 바로 그 사람이 무인인 것이다. 중국 고대 예제의 기원은 신과 통하는 무술巫術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그런데 무인은 옥을 제작하는 기술을 독점함으로써 천지신에게 제사 지내는 특권을 농단하고 천지를 관통하는 능력을 보였으며, 하늘과 땅의 경지를 아는 지자智者로 우뚝 섰다. ‘옥으로 신에게 보인다(以玉示神)’는 옛말이 바로 그것이며, 그 주인공은 바로 무인이라는 말이다.
즉 중앙 대형묘의 주인공은 신과 통하는 독점자로서 교주이면서, 왕王의 신분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정일치 시대의 단적인 모습이다. 이는 당시의 씨족 구성원들의 신분 분화가 이미 명확했으며, 집단의 수령이 이미 출현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외에, 중형 묘지들도 항상 옥기를 매장하여, 옥기가 홍산문화에서 중요한 부장품이 되었다. 이같이 옥을 매장하는 현상은 홍산문화 특징 중의 하나이다.
옥은 장식으로서의 예술적 가치 이외에 신분과 지위의 상징이기 때문에 정치적인 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매장함으로써 영생永生을 기원하는 종교적인 의미도 갖고 있다. 옥을 갖게 됨으로써 영생불멸永生不滅한다는 생각과 당시 고대사회의 어떤 신분상의 등급과 권력에 대한 관념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이것이 바로 예의 원형이다.
이렇게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비실용적인 옥기를 거의 유일한 부장품으로 하였을 뿐, 토기와 석기 등 생산활동과 다양한 관계를 가지는 기물은 부장하지 않았다. 왕국유王國維는 ‘예는 두 개의 옥으로 신을 나타낸 기물’이라 해석하여, 옥과 예가 특수한 관계에 있었음을 밝힌 바 있다.
옥만을 수장한 것은 옥기가 최초의 예기였음을 증명할 뿐만 아니라, “옥만이 예기가 된다”고 하는 바로 그것이 예의 본래 뜻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오직 옥만이 신과 교통할 수 있다는 홍산문화의 주인공들의 사상적 관념을 나타내는 것이다. 무인은 신과 소통을 통해 옥을 독점하고, 또 옥을 통해 스스로가 신적인 존재임을 만천하에 알린다. 결국 무인巫人과 하늘(神)과 옥玉은 삼위일체인 셈이다.
보통 중국 상고사를 석기-청동기-철기 등 3단계로 구분한다. 그런데 홍산문화에서 보듯이 석기와 청동기 사이에 옥기 시대도 중요한 시대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구분의 필요성을 파악해서일까? 여기에서 옥玉의 시대를 넣어 석기-옥기-청동기-철기 등 4단계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이미 2000년 전부터 나왔다. 후한 때 원강이 지었다는 『월절서越絶書?에 따르면 풍호자風胡子라는 사람이 초나라 왕에게 치국의 도를 이야기 하면서 옥기시대를 언급했다. “헌원·신농·혁서의 시대에는 돌을 병기로 삼았고(석기), 황제의 시대에는 옥玉으로 병기와 신주神主를 삼았다. 우임금 때는 청동기를, 그 이후엔 철기를 썼다.” 그는 중국의 고사를 석기-옥기-청동기-철기의 네 단계로 나누고 있다.
이렇게 석기시대와 청동기 시대사이에 고도로 발달된 옥문화를 표지로 하는 시대에 대해 학자들은 옥기시대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2) 배달 동이는 홍산문화의 주인공
홍산문명을 상징하는 적석총·제단·여신묘의 제사유적군은 대표적인 동이문화이다.
우하량 제2지점에서 3층으로 이루어진 원형圓形의 제단과 방형方形의 돌무지무덤이 발굴되었다. 제단과 무덤 모두가 돌을 쌓아올려 만든 적석총으로, 원형과 방형이 앞뒤로 나란히 배치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배달 조선과 단군 조선을 건국한 주류 세력인 동이족이 창출한 독특한 문화양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적석총이 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시하게 여기는 분야는 묘장법墓葬法인데 죽은 사람을 장례 치르는 의식은 오랜 기간 변하지 않는 그 민족 고유의 전통이기 때문이다. 적석총, 즉 돌무지무덤은 한반도와 만주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한민족의 전형적인 무덤으로 고구려와 초기 백제에까지 이어진 대표적인 양식이다.
우하량 적석총 유적에서 석관묘石棺墓가 발견되었다. 이들 석관묘는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짠 상자 모양의 석관과 깬 돌을 쌓아 올린 석관이 함께 배치되어 이루어졌는데, 안에서는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채색토기·옥기 등 전형적인 홍산문화 유형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동이족은 시신을 매장할 때 돌을 가지고 축조했는데, 이것이 석묘이다. 석묘중에서도 대표적인 무덤 형식의 하나가 바로 석관묘이다. 이렇게 한반도에서 발견되고 있는 석관묘와 그 구조와 축조방식이 동일한 무덤양식이 홍산문화 시기 우하량 유적지에서 발견되었다. 이는 홍산문화가 한반도 지역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요령성의 다른 두 곳에서 우하량의 적석총과 비슷한 유적이 발견되었다. 객좌현喀左縣 동산취東山嘴에서는 제단이 있는 석조 건축물과 적석묘군이 발견되었고, 부신현阜新縣 호두구胡頭溝 유적에서는 우량하의 무덤과 비슷한 무덤(석관묘)군이 발견되었다. 방사선탄소 연대측정에 의해 두 곳 모두 기원전 35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까지도 한반도 신석기문화는 시베리아에서 몽골·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건너왔다는 설이 우리 학계를 지배해왔다. 신석기시대 문화를 대표하는 빗살무늬토기도 시베리아에서 몽골·만주를 거쳐 한반도로 건너왔다는 것이다.
고고학계의 원로인 김원룡은 신석기문화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청동기문화도 시베리아의 청동기문화를 받아들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훨씬 앞선 시대에 이미 동이족의 땅에는 시베리아 지역의 문화보다 더 찬란한 문화가 꽃피고 있었던 것이다.
문헌상에서 볼 때 홍산문화와 동일한 석묘계의 묘장법을 채용하고 있는 나라가 고조선이다. 그러므로 고조선문화의 전 단계인 홍산문화는 동북아시아의 강대국가를 이룩했던 고조선의 선조들이 이룩한 문화로 인정돼야 함이 마땅하리라 본다.
1983년 우하량 제2지점의 북쪽 산 중턱에서 거대한 신전 터가 발굴되었고, 이곳에서 여신상과 함께 곰의 아래턱 뼈, 곰의 대퇴부, 그리고 곰 발톱 모양의 진흙 토기 등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홍산문화의 주도 세력의 정체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이다.
홍산문화의 주인공인 홍산인은 곰토템족이었다.
중국학자들은 홍산문화의 곰토템을 황제족과 연결시켜 요서지역이 황제족 영역이었다는 논리로 전개시키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 우하량 지역을 웅산熊山이라고 보고 유웅씨有熊氏와 그 후예인 황제黃帝 헌원軒轅, 그리고 황제의 손자 고양왕 전욱顓頊등의 조상으로 여긴다.
1980년대 요령성박물관 난신건藺辛建은 「홍산문화와 고고전설」에서 “홍산문화는 전욱, 제곡의 유존”이라고 하였다. 곽대순은 “홍산문화의 고고발굴 결과 고사전설은 황제중심의 오제시기로, 전기의 대표인물(전욱과 제곡)이 북방지구에서 활동한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엽서헌葉舒憲은 곰토템의 황제집단 기원설을 주장했다. 그는 “동북아지역 여러 민족의 전래 곰토템 신화는 중국인들의 공동조상인 황제집단에서 기원하며, 단군신화는 중국 황제족黃帝族의 곰토템신화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곰토템은 유웅씨有熊氏라는 별명을 가졌던 황제집단에서 시작돼 우순虞舜 시대와 하夏나라 시대로 이어졌고, 곰을 조상으로 삼는 신화는 전욱顫頊을 거쳐 진秦나라, 조趙나라, 초楚나라의 광범위한 지역으로 전승됐다는 것이다. 그는 ‘옥웅룡’을 곰과 용이 합쳐진, 중국인을 대표할 수 있는 도상이라고 규정한다.
곰토템은 『제왕세기帝王世紀?의 “황제위유웅黃帝爲有熊”의 기록을 근거로 한다. 소병기蘇秉琦는 “황제시대의 활동중심이 홍산문화의 시공구조와 대응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곰토템은 황제에게서 증명된다. 황제의 호가 유웅有熊인 원인은 (1)유웅에 도읍을 하였고, (2)유웅국 군자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국의 학자들은 중국의 고문헌에는 황제족의 곰토템과 관련된 기록이 없지만 그 실마리는 남아 있기 때문에 황제족 곰토템 신화를 복원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홍산문화의 주인공은 동이족으로, 곰을 토템으로 하는 웅녀족이 환국의 후손인 환웅족에 의해 문명화된 사실을 전하고 있는 『삼성기?의 기록과도 일치하고 있다.
『삼성기?는 기원전 6,000년경 한민족사의 첫 출발점인 배달의 개국 무렵,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인 웅족이 환국의 후손인 환족의 은혜로 교화되고 문명화된 사실을 전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기원전 3,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통상 청동기 시대에나 출현 가능한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가면과 옥 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돼 국내 학자들은 곰 토템을 지닌 웅족과 고조선(청동기 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배달국(신석기 시대)이 자리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배달문화가 홍산문명이며 홍산문화계열은 하가점문화까지 발전하였고 바로 고조선의 단군문화로 이어진다. 즉 홍산문화는 환국의 후손인 배달 겨레가 중심이 되어 이룩한 문화로, 그 기반위에 단군조선이 건국되었다.
홍산문화의 주인공들은 중국 한족의 조상들이 아니라, 바로 동방 한민족의 조상, 동이東夷 배달족이 그 문화의 주체 세력인 것이다.
3) 신선문화
신선사상이란 인간이 인간 스스로가 개발한 신선神仙 방술方術에 의해서 불사不死의 생명을 향유하는 동시에, 신神과 같은 전능全能의 권능을 보유하여 절대적 자유의 경지에 優游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사상이다. 그것은 곧 인간의 신화神化를 생각하는 사상이다.
사람은 본래 한번 태어나면 반드시 늙어 죽게 마련이나,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이 확대되어 불로장생을 갈구하는 신선사상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에서는 주로 제왕이나 제후 등 현세적인 권력과 쾌락의 영속을 바라는 계층에서 적극적으로 신선을 갈구하여 불로장생을 기도하는 방향으로 그 사상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동방의 한민족이 건립한 황금시대는 성립하는 단계부터 신선문화의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고, 그것은 민족 발전의 방향을 조정하며 개인생활의 품위를 높이는 목표를 찾아내는 등 공동체의 향상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류 시원 국가인 환국시대 때는 인간이 대자연과 한마음 되어 천지의 조화신성 속에 살았다. 그야말로 인간은 하늘의 신성을 그대로 발현하여 천지의 광명으로 빛나는 존재들로, 하늘과 직접 소통하며 무병장수하는 삶을 추구하였다. 원형문화인 신교의 수행은 궁극적으로 성性·명命·정精 삼진三眞을 회복함으로써 천지와 더불어 영원히 사는 우주적인 인간, 즉 태일 인간이 되기 위한 것이다. 삼신의 도를 아는 철인들은 일상생활에서 감정을 다스리는 ‘지감止感’, 호흡을 고르게 하는 ‘조식調息’, 촉감을 금하는 ‘금촉禁觸’으로써 삼도를 잘 다스려, 궁극에는 자기 안에 내재된 조물주 삼신을 발현시켜 삼신의 조화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러한 수행의 전통은 배달국을 연 환웅 시대, 단군왕검의 고조선 시대로 이어졌다. 삼칠일을 택하여 바깥일을 꺼리고 삼가 문을 잠그고 수도한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렇게 한국 신선 사상은 상고의 시원에 연원을 두고 끊임없이 이어진 고유 사상이다. 최치원이 풍류도라 부르는 우리나라 고유한 도의 중추는 신선사상으로, 신으로써 가르침을 베푸는 신교神敎는 신시 배달시대부터 있었다.
동방 한민족은 삼신상제님을 모시고 하늘에 계신 삼신상제님께 천제天祭를 올리며, 그 가르침대로 살았다. 그리고 수행을 통해 천지 광명의 신령한 한 기운과 하나 되는 것을 꿈꾸었다.
『환단고기?에서는 9천 년 전 환국의 안파견 환인 이래로 동북아 문화권에서 행한 수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처음에 환인께서 천산에 머무시며 도를 깨쳐 장생하니시 몸에는 병이 없으셨다.
그런데 환인은 자신의 불로장생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대신해서 교화를 일으키고 평화롭게 살도록 만들어 사람들이 모두 근면하게 일하고 굶주림과 추위로 고생하지 않게 되었다고 하여 득도장생의 공용성이 강조되었다.
(환웅께서) 신령한 도술로써 환골換骨케 하여 정신을 개조시키셨다. 이때 먼저 삼신께서 전해주신 정해법(靜解法 : 몸과 마음을 고요히 수행하여 해탈하는 법)으로써 그렇게 하셨는데, 쑥 한 묶음과 마늘 스무 매를 영험하게 여겨 이를 주시며 경계하여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이것을 먹을지어다.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고 기도하라. 그리하면 참된 인간이 되리라.”
이처럼 인류 황금시절에는 우주의 언어, 신의 언어, 생명의 언어를 노래하는 주문 수행을 했다.
최근 홍산문화에서, 지금으로부터 5천여 년 전에 만들어진 수행하는 사람 형상의 조각상이 발굴되었다. 적봉시의 유적에서는 두 손을 단아하게 모으고 주문을 읽고 있는 젊은 남신상이 나왔고, 우하량 여신묘 유적에서는 여신의 두상頭像이 나왔는데 이를 근거로 복원한 여신상의 자세는 가부좌를 틀고 수행하는 모습이다.
(1) 반가부좌한 여신상
사람의 실물크기 모습에 가슴이 풍만하고 반가부좌를 틀고 있는 이 유물을 학자들은 여신상女神像으로 불렀다. 여신묘女神廟 주변에 적석총군이 함께 발견되어 이 여신 또한 홍산인들에게 조상신으로 숭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옥웅룡玉熊龍은 죽은 자의 가슴팍에 주로 놓여 있었는데, 가슴팍에는 가장 등급이 높은 옥기가 놓인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일종의 신물神物이었던 것이다. 홍산문화 숭배동물중 웅룡은 특정지위를 가졌고, 홍산인이 숭배하는 동물신 가운데 주신主神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홍산인들이 여신과 함께 곰을 숭배하는 곰토템족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홍산문화의 곰숭배는 환웅족, 웅녀족을 포함한 동이족의 문화 원형을 보여주고 있다. 웅녀족은 곰을 숭배했다. 기원전 3500년이면 모계사회였으니 곰족은 곧 웅녀족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우하량 여신전은 제사터이므로, 웅녀족은 이곳에서 성스러운 제사를 지낸다.
(2) 주문을 읽는 남자
2012년 7월 초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내몽골 제1공작대와 오한기박물관의 합동발굴팀은 중국 내몽골 적봉시 오한기 흥륭구 유적 제2지점에서 53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도소남신상(陶塑男神像, 흙으로 구운 남신상)’을 발굴하였다.
이 남자 조각상은 땋아 올린 것처럼 보이는 머리모양에 다리는 반가부좌를 틀고, 손을 하단전에 공수자세로 가지런히 모으고, 입은 ○자 모양으로 크게 벌리고 있는 모습으로 주문수행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주문수행상이 발견된 지역은 우리 민족의 시원국가인 배달국과 고조선이 있었던 지역으로 추정된다.
앞의 여신상이 반가부좌 모양으로 수행의 자세를 강조했다면 뒤의 남신상은 같은 자세에 입을 벌린 모습을 통해 주문수행을 강조하고 있다. 이 남신상의 주문읽는 모습에서 우리는 모든 종교의 수행과 기도 문화의 원형을 찾을 수 있다.
천상의 음악, 우주의 음악인 주문을 노래하는 수행은 인류문명의 황금시절인 환국, 배달, 고조선 시대에 보편적인 생활문화였다.
2. 신시 배달의 선인들
선인은 어떤 존재인가?
선仙자는 인人(사람 인)자와 산山(뫼 산)자가 결합한 것으로 ‘신선’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옛날 사람들은 높은 산에 만물을 생성하게 하는 특수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높은 산의 정상은 천상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선인의 상승적, 초월적 성격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선의 개념이 산악숭배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 후대의 ‘지선地仙’의 개념과도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또한 ‘선’은 한나라 이전에는 ‘선僊’으로 썼다. ‘선僊’은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첫째, 장생불사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뜻한다. 『설문해자?에서 ‘선僊’은 “오래 살다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간다.”(長生仙去)는 뜻이다. 장생長生과 승천昇天은 선의 요체이다. 『장자? 「천지」에는 선인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다.
천하에 도가 있을 때에는 만물과 함께 다 번창하고, 천하에 도가 없을 때에는 덕을 닦아 한가롭게 산다. 천 년을 살다가 세상에 싫증이 나면 하늘로 올라가 신선이 된다. 저 흰 구름을 타고 제향에 이르니, 세 가지 근심이 이르지 못하고 몸에는 항상 재앙이 없다.
신선이 되면, 모든 질병과 생사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천지 사이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다.
둘째, ‘선僊’은 춤추는 옷소매가 바람에 펄럭인다는 뜻이다. 즉 ‘선’은 본래 긴 소매 옷자락을 휘날리며 춤춘다는 뜻이다. 너울너울 춤추며 하늘을 자유로이 날아오르는 신령스러운 존재가 바로 신선이다.
이렇게 신선은 초월적超越的 성격과 비상적飛翔的 성격과 불사적不死的 성격을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창세 역사를 서술하는 ‘단군신화’는 한민족의 이상적 삶으로 ‘선仙으로서의 인간’을 말하고 있다. 환웅은 사람으로 왔고 웅녀는 이 사람이 되고자 했다. 환웅과 그 무리들의 삶을 이끄는 지표는 한 글자로 선이었다. 하느님을 모시고 그 분의 뜻을 따르고 수행을 통해 천지 광명의 신령한 한 기운과 하나되는 것이다.
한민족 신선 도가의 계보인 도맥道脈은 대체로 환인을 시조로 환웅-단군-영랑永郞-보덕성녀普德聖女로 이어진다. 그러나 고려·조선에서의 승계는 애매하다. 도맥道脈에 대해서 『백악총설?에서는 환인桓因을 도맥의 개조開祖로 삼고 있으나, 『청학집?에서는 더욱 거슬러 올라가 광성자廣成子에서 시작한다. 『백악총설?의 계보는 환인환웅桓雄단군문박을밀乙密영랑永郎안류晏留보덕성녀普德聖女이다.
『청학집?의 계보는 광성자명유明由환인환웅단군문박영랑보덕옥보고玉寶高이다.
1) 선인仙人 발귀리發貴理
「소도경전본훈」에 선인 발귀리가 아사달에 와서 삼신상제 제천행사를 보고 지은 송가에 대해 기술하였다.
신시 시대에 선인 발귀리發貴理는 대호大皞(태호太皞, 태호복희太昊伏羲)와 동문수학하였는데, 배달의 신교문화, 우주광명 문화를 아주 깊이 체득한 분이다. 도를 통한 후에 방저方渚와 풍산風山 지역을 유람하며 자못 명성을 얻었다. 아사달에 와서 제천행사를 보고, 천제가 끝나고 나서 찬송하는 글을 지었다.
인류 최초의 나라 환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배달국 초대 환웅천황은 소도蘇塗에서 하늘의 상제님께 감사와 보은의 예식을 올렸다. 소도蘇塗는 우주의 통치자이신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리는 제천의식이 거행되던 성스러운 곳이다. 천신에게 기도 올리고 천제를 올린 땅을 제천소도祭天蘇塗라 한다. 문화의 중심지 수도에서 천문지리적으로 볼 때 산수의 틀이 천연적으로 가장 잘 생긴 곳을 택해서 소도蘇塗로 삼는다. 소도는 성스러운 땅, 천지의 성스러운 기운이 소생하는 터이다.
발귀리는 소도제천 행사, 소도의 천제를 보면서 천지에서 우주광명의 기운을 온몸으로 체득하면서 송가를 불렀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만물의 큰 시원[大一]이 되는 지극한 생명이여!
이를 양기良氣라 부르나니
무와 유가 혼연일체로 있으며
텅 빔[虛]과 꽉 참[粗]이 오묘하구나.
삼(三神)은 일(一神)로 본체[體]를 삼고
일(一神)은 삼(三神)으로 작용[用]을 삼으니
무와 유, 텅 빔과 꽉 참(정신과 물질)이 오묘하게 하나로 순환하고
삼신의 본체와 작용은 둘이 아니로다.
우주의 큰 빔 속에 밝음이 있으니, 이것이 신의 모습이로다.
천지의 거대한 기[大氣]는 영원하니
이것이 신의 조화로다.
참 생명이 흘러나오는 시원처요, 만법이 이곳에서 생겨나니
일월의 씨앗이며, 천신(상제님)의 참 마음이로다!
만물에 빛을 비추고, 생명선을 던져 주니
이 천지조화(의 광명과 대기大氣) 대각하면 큰 능력을 얻을 것이요
성신이 세상에 크게 내려 만백성 번영하도다.
선인 발귀리의 깨달음의 대서사시는, 이 우주의 본성이 허, 텅 빔이고, 그 속에 무한의 생명이 출렁이고 있는데, 그것과 하나가 되려면 마음을 온전히 비워야 된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마음을 완전히 비워서 완전한 허의 경계, 자연과 진정한 하나가 될 때 깨달음이 열린다는 것이다.
선인 발귀리發貴理는 하도河圖와 8괘의 주인공인 태호복희太昊伏羲와 동문수학하였다. 『환단고기?에 의하면, 배달국의 5세 태우의환웅은 아들 열둘을 두셨는데, 이 5세 환웅의 막내아들이 바로 태호복희이다.
복희씨는 신시에서 출생하여 우사 관직을 세습하였고, 후에 청구·낙랑을 지나 진으로 옮겨갔다. 그 서쪽에는 수인씨가 정착해 있었는데 복희씨는 신시배달의 선진 문화를 전수하고 수인씨를 이어 왕이 되었다. 그리고 풍산風山에서 살게 되어 성을 풍씨로 하였다.
선인 발귀리도 도를 통한 후에 방저方渚와 풍산風山 지역을 유람하며 자못 명성을 얻었다고 하니 태호복희와의 교감도 지속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태호복희는 하도河圖를 그려 음양오행 사상의 기틀을 마련하고, 팔괘를 지어 ?주역?의 원리를 구성하였다. 복희의 최대 업적은 변화의 질서인 역을 창시한데 있다. 역의 기본은 팔괘로 이루어져 있고 우리나라 태극기의 건곤감리가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복희팔괘는 황하에서 나온 용마의 등에 있는 도형을 보고 계시를 얻어 복희가 하도를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천문지리를 살피고 만물의 변화를 고찰하여 만들었다고 한다. 종이 한 장에 다 그려지는 이 도표 하나에서 음양오행 원리가 나오고, 공간과 시간의 순환 원리가 나온 것이다. 복희팔괘는 천지만물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현상의 이치를 담고, 오랜 세월을 중국뿐만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역에 걸쳐 그 삶과 역사에 영향을 끼쳐왔다.
복희가 팔괘를 지었다는 것은 ?주역?「계사하」에 기록되어 있어 거의 이설이 없다. 「계사하」에는 복희가 팔괘를 짓게 된 경위와 그 효용을 비교적 상세히 밝히고 있다.
옛날에 포희씨가 천하를 다스릴 때, 위로는 우러러 하늘의 상을 관찰하고 아래로는 굽어 땅의 법을 관찰하였으며, 옆으로는 날짐승과 들짐승의 현상과 땅의 마땅함을 살펴 가까이는 자신의 몸에서 취하고 멀리는 모든 사물에서 비유를 취하여 팔괘를 처음으로 그렸다. 그리하여 신명의 덕과 통하게 하고 만물의 상황을 종류대로 분류하였다.
서한 장형張衡의 「동경부東京賦」에는 “용이 그림을 복희에게 주었다(龍圖授羲)”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에 대해 설종薛綜은 주에서 ?상서전尙書傳?을 인용하여 복희가 천하를 다스릴 때 용마가 하수河水에서 나왔는데 마침내 그 무늬를 바탕으로 해서 팔괘를 그렸다. 이를 하도라고 부른다고 하여 팔괘 자체를 하도라고 설명하기도 하였다.
복희가 역易을 지었다는 말은 ?역통괘험易通卦驗?에 나온다. 그리하여 ‘희경犧經’ 혹은 ‘희경羲經’이라는 말은 ?역경?을 말하는데, 복희가 처음으로 팔괘를 만들었기 때문에 일컫는 것이고, 이를 다른 말로 ‘희역羲易’이라고도 한다.
『역전易傳?에서는 『역위易緯?와 같이 모두 복희가 팔괘를 그린 것이 자연계의 모든 사물에 대해 우러러 보고 굽어 관찰한 후의 추상적인 총괄이며 팔괘를 그린 목적과 효용은 “신명의 덕과 통하게 하여 만물의 상황을 종류대로 분류”하는데 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발귀리 선인은 또한 태백산 사선각의 사선四仙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태백산 사선각의 사선四仙은 배달과 고조선 시대에 명성이 자자하던 선인으로서 선인仙人 중의 선인仙人을 가리키는데, 기원전 3500년경의 발귀리發貴理 선인과 발귀리 선인의 후손으로 동서방 신선문화의 원조元祖라고 일컬어지는 기원전 2700년경의 자부선생紫府先生과, 삼년상의 원 시조인 기원전 2240년경의 대련大連 선인과 3세 단군 때 삼랑三郞이었던 기원전 2180년경의 을보륵乙普勒 선인을 지칭한다.
2) 자부선생紫府先生
「삼한관경본기」에 자부선생의 공덕에 대해 자세한 기록이 보인다.
「삼한관경본기」에 의하면, 자부선생은 발귀리發貴理 선인仙人의 후손으로서 도학道學의 학문이 높았다.
자부선생은 일찌기 해와 달의 운행을 측정하여 정리하고 오행五行의 수리를 따져서 칠성력七星曆의 기원이 되는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를 저작하였다. 즉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를 밝히고 칠성력이라는 달력을 만든 것이다.
칠정운천도七政運天圖는 태양(해), 태음(달, 月), 수성水星, 화성火星, 목성木星, 금성金星, 토성土星 등 7개의 별이 하늘을 운행하는 모습을 관찰하여 만든 운행도運行圖로서 칠성력의 기초가 된다.
오행론은 뒤에 창기소蒼其蘇라는 사람이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밝혔는데, 이것이 『황부중경黃部中經?에 속하는 것이다. 우禹가 부루태자를 찾아 뵙고 『황제중경黃帝中經?을 전수 받았는데, 바로 배달의 『황부중경?이다. 우는 이것을 가지고 가서 치수하는 데 활용하여 공덕을 세웠다.
「삼한관경본기」에 의하면, 자부선생이 칠회제신력七回祭神曆을 만들고 『삼황내문경?을 천황께 바쳤다. 천황께서 기뻐하시고 삼청궁三淸宮을 지어 기거하게 하셨다.
공공·헌원·창힐·대요의 무리가 찾아와서 모두 자부 선생에게 배웠다.
윷놀이판의 그림이 곧 환역桓易인 바, 한역을 윷놀이로 만드신 분이 바로 자부선생이다. 이 한역은 배달나라 초기 신지神誌 혁덕赫德이 가르친 것을 자부선인이 재차 정리한 것으로 대체로 ?천부경?이 전하는 취지이다.
자부선생紫府先生은 배달국 치우천황의 스승으로, 동서방 신선문화의 원조이다. 서쪽으로는 황제 헌원에게 신서(『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를 주어 도道를 전하였다. 이에 황제 헌원은 오늘날 중국 도가의 시조가 되었다. 동쪽으로는 고조선 국자랑의 스승인 유위자有爲子에게 학문과 도를 전하였다. 이후 유위자의 선도사상은 수천년의 장구한 세월동안 선인통치의 기반이었고, 홍익인간하는 치국의 이념이 되었다.
진晋나라 갈홍葛洪이 지은 『포박자抱朴子?에는 “황제가 동방 청구에 와서 풍산을 지나다가 자부선생紫府先生을 만나 보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얻어서 만신의 이름을 새겼다”는 기록이 있다.
자부선생은 약 10년간에 걸쳐 치우천왕과 탁록전?鹿戰을 벌이는 등 100여회의 난亂을 일으킨 황제헌원에게 도道를 깨우치게 하였다. 『삼황내문경?은 자부선생이 황제헌원黃帝軒轅에게 준 가르침이다.
황제헌원은 공손씨의 후손이다. 『사기?에는 헌원의 호를 유웅有熊씨라 했다. 유웅씨는 환웅께서 배달을 건국할 때 통합, 흡수된 웅족熊族 계열로서 동방 문화를 개척한 주역이다.
황제헌원은 염제신농과 더불어 소전의 아들로 불린다. 『국어 ?「진어」에서 “소전少典이 교씨蟜氏를 맞아들여 황제를 낳았다.”고 기록한 것을 필두로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제왕세기帝王世紀? 등의 문헌에도 황제를 소전의 아들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사마정司馬貞은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색은索隱에서 소전은 인명이 아니라 제후국을 칭하는 명칭이라고 지적하였다.
소전은 제후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인명이 아니다. 『국어 ?「진어」에 소전少典이 교씨蟜氏를 맞아들여 황제와 염제炎帝를 낳았다고 하는데, 염제와 황제는 중간에 8대, 오백여년의 간격이 있다.…『진본기?에 대업이 소전씨를 취하여 백의를 낳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소전은 국명이고, 인명이 아니다.
이를 통해 소전이 인명이던 씨족명이던 황제는 신농과 더불어 소전의 후손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황제는 신농과 8대, 오백여년의 간격이 있으나 신농과 황제는 소전의 후손으로 종종 형제관계로 묘사된다. 『운급칠첨雲笈七籤?「헌원본기軒轅本記」에는 “황제헌원은 성은 공손이며 헌원은 황제黃帝이며 희수에서 태어나서 희로서 성을 삼았다. 유웅국의 임금인 소전의 둘째아들이며 복희가 소전을 낳았고 소전은 신농을 낳고 헌원을 낳았다.”고 염제가 형이라고 형제간의 서열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환단고기?「삼신오제본기三神五帝本紀」에 의하면
복희가 다스리던 나라를 신농이 다스려 왔는데 마지막 임금인 유망楡罔에 이르러 정치를 어지럽게 하여 나라가 혼란하였다.
치우는 유망을 토벌하여 서쪽 땅을 안정시키기로 하였다. 치우는 군대를 이끌고 유망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이 때 헌원은 자기도 천자가 되겠다는 뜻을 품고 탁록에서 크게 군사를 일으켜 대항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탁록 대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치우가 군대의 진용을 정비하여 사면으로 진격한 지 10년 동안 헌원과 싸운 것이 73회나 되었다. 치우 군대는 헌원을 향하여 사방에서 조여 들어 갔으나 굴복하지 않자 크게 안개를 일으켜 지척을 분간할 수 없게 하고 싸움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헌원이 여러 차례 싸워 치우에게 패하고도 다시 크게 군사를 일으키고 치우를 본받아 병기와 갑옷을 만들고 지남거指南車를 만들어 감히 백번이고 싸움을 걸어왔다.
치우의 군사는 헌원이 다시는 싸울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한 판 큰 싸움을 벌려 한 개의 진을 완전히 초토화 하였다. 이 때 비석박격기飛石迫擊機를 처음 사용하였는데 이 무기로 진을 이루고 진격하니 헌원의 군대는 끝내 저항하지 못하였다. 이 후에야 싸움이 그쳤다.
황제헌원은 10년 동안 치우천왕과 73회나 싸웠으나 끝내 이기지 못하였다. 긴 전쟁에서 지칠대로 지친 황제는 자부선생을 찾아뵙기에 이르렀다. 선생은 당시 배달나라의 대석학이며 선인이었다. 선생의 가르침을 받겠다는 황제의 청을 받은 자부선생은 『삼황내문경?을 주면서,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을 바로 다스려 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였다.
황제 헌원은 자부선생으로부터 『삼황내문경?을 전수받아 도를 닦아 배달나라의 진정한 신하가 되었다. 이로써 『삼황내문경?은 중국에 널리 전해졌다.
「신시본기」에 의하면 일찍이 강태공이 『음부경주陰符經注?를 지어 자부선생의 『삼황내문경?의 뜻을 조술祖述하였다
이를 통해서 적어도 주나라 초기에는 『삼황내문경?이 널리 알려졌고, 그 의미까지 밝혀지고 전술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황내문경?은 배달나라 초기 문자인 녹서鹿書로 기록된 세편으로 나뉘어진 책이다. 후대에 생긴 신선음부설神仙陰符說은 이 『삼황내문경?에서 나온 것이 된다. 즉 황제 헌원이 자부선생으로부터 전수받은 『삼황내문경?은 고대 중국 도교道敎의 뿌리가 되었다.
자부선생의 후학 유위자有爲子
유위자有爲子는 자부선생의 후학으로, 묘향산妙香山에 은둔하면서 자부선생의 학문을 닦았다.
유위자는 천문지리와 인도 등 모두를 달통한 단군조선 2천년 사이에 보기 드문 대학자이다. 발해인 대야발大野勃이 지은 『단기고사檀奇古史?에서는 유위자를 11세 도해道奚 단군의 태자의 스승이라 하였다.
유위자는 천지 대도의 말씀을 전하면서 도의 근원은 삼신에게 있음을 밝혔다.
이때 유위자가 묘향산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그의 학문은 자부선생에게서 나온 것이다.
지나는 길에 웅씨 임금을 알현하니, 임금이 “나를 위해 도道를 설명해 주겠소?”라고 청하였다.
이에 이렇게 대답하였다. “도의 큰 근원은 삼신에서 나옵니다[道之大原 出乎三神].”
공자의 10세손인 공빈孔斌이 지은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상나라의 탕湯 임금을 보필하여 하나라의 마지막 왕 폭군 걸桀을 쫓아낸 명재상 이윤伊尹이 유위자의 문하에서 대도를 전수받았다고 하였다.
유위자는 하늘이 내린 성인인데 그에게서 중국中國이라는 호칭을 얻었고 이윤이 그 문하에서 배워 현명한 재상이 됐다
『단기고사檀奇古史?에서도 유위자가 이윤을 천거하는 내용이 보인다.
임금께서 “하나라를 대신하여 천자天子 될 사람이 누구냐.” 하시니 유위자가 대답하기를 “신이 하나라의 인물을 살피니 하나라에는 그런 인물이 없고, 다음가는 사람으로는 천을天乙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어진 보좌관賢佐인 이윤伊尹을 얻어 덕행德行을 길러 그 이름이 세상에 높아졌으니 하나라를 쳐서 천자가 된다면 그 자손이 600여 년은 이어나갈 수 있겠습니다.”
유위자는 고조선의 신교 문화가 동이족인 상나라의 정치·문화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도록 다리를 놓았다. 자부선생이 신교를 이론적으로 체계화시켰고, 그 제자인 유위자가 학문적으로 집대성하였다.
이윤은 본명이 윤지尹摯이다. 이윤은 재주와 지혜가 뛰어났으며 탕을 도와 하나라를 무너뜨리고 상나라를 세운 개국공신이다.
『서경書經?에 따르면 이윤은 탕湯 임금의 재상이었다. 탕 임금은 하나라 걸桀 임금이 학정을 일삼는 것을 보고 이윤 같은 이가 임금을 보좌하면 나라가 올바로 다스려질 것이라고 믿고 이윤을 다섯 번이나 걸 임금에게 보냈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고 되돌아 왔다. 이에 탕 임금은 이윤을 자기의 재상으로 삼아 선정을 베풀었고, 이윤은 탕 임금이 하나라 마지막 왕 걸桀 임금을 쳐부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탕 임금이 돌아간 뒤에는 그의 손자 태갑太甲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태갑은 무도하여 이윤은 그를 동桐 땅으로 내쳤다가 3년 후 태갑의 뉘우침을 보고 다시 박亳으로 데려왔다.
이윤이 탕왕을 도와서 걸을 치는데 이陑 땅에서 출전하여 마침내 명조의 들판에서 걸왕과 싸웠고 「탕서」를 지었다.(『서경書經?「탕서湯誓」)
3) 광성자廣成子
광성자는 발귀리, 자부선생에 비해서 더욱 신비스런 존재이다. 광성자에 대해서는 문헌자료가 적을 뿐만 아니라 내용도 서로 모순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도맥의 계보로 『청학집?에서는 환인보다 앞선 인물로 나오기도 하지만, 문헌 자료를 통해서 보면 자부선생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환단고기?에도 그의 존재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 한국의 도교사에서 광성자廣成子는 중요한 인물이다. 일부 도맥에서는 이 광성자가 한국 도교의 원류라고 주장하는데, 『청학집?에 따르면 광성자에게는 명유라는 제자가 있고, 명유는 환인에게 도를 가르쳤다고 한다.
광성자廣成子는 『장자? 「재유」편과 『신선전?에 따르면 공동산崆峒山의 석실石室에서 선도를 닦으며 살고 있었는데, 황제 헌원이 찾아와 도를 물으니 가르침을 내렸다고 한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황제는 자부선생을 찾아 뵙고, 자부선생으로부터 『삼황내문경?을 전수받았다. 즉 황제 헌원은 광성자와 자부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그래서 광성자와 자부선생이 동일인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광성자와 자부선생이 동일인물이라는 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황제 헌원이 광성자와 자부선인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광성자의 거처인 공동산이 청구국에 있었다는 식의 논지를 펴고 있다. 이능화는 공동산은 계구薊丘에 있고, 계구는 청구의 영역에 있다고 지적하였다.
『장자莊子? 외편外篇 「재유在宥」에는 광성자와 황제 헌원의 문답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황제黃帝가 천자의 자리에 오른 지 19년에 광성자廣成子가 공동산空同山에 있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찾아가 만나보고 ‘지극한 도의 정수(至道之精)’에 대해 물었으나, 답을 얻지 못하였다. 황제는 물러나 있다가 다시 광성자를 찾아가 오래사는 법에 대해 질문을 하였다.
황제가 “저는 선생께서 지극한 도에 이르렀다고 들었으니 감히 묻겠습니다. 몸을 어떻게 닦아야 장생구시長生久視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광성자는 나는 순일純一한 도를 지켜서 조화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몸을 닦은 지 1200년이 흘렀는데도 내 몸이 아직 쇠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이에 황제는 “광성자廣成子 선생이야말로 하늘이라고 일컬을 만합니다!”라고 높이 받들었다.
이상과 같이 황제 헌원은 자부선생과 광성자에게 동시에 도에 대해 가르침을 구했다. 『운급칠첨雲笈七籤?에도 황제 헌원은 광성자를 스승으로 받들고 있고, 자부선인을 찾아 가르침을 받은 내용이 동시에 보인다.
광성자가 자부선생과 동일인인지는 알 수 없으나, 동시대인으로 도학의 학문이 높은 선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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