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

철학자들, 그들의 깊은 사유와 '웃픈' 삶 10 칸트 (2)

황경선 연구위원

2022.07.28 | 조회 127


2. 그의 생애는 삶도 역사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일상 언어에서는 실존이라는 말이 갖는 독특한 위치가 얼른 눈에 띠지 않는다. 그렇지만 예를 들어 우리가 판사 앞에서 증인 페터가 실존합니다.’고 주장할 때와 페터는 남자입니다.’고 말할 때는 벌써 차이가 있다. 전자의 경우라면, 판사는 즉시 페터가 어디에 살고 있는가?’ 하고 물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실존한다는 주장은 그를 보았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페터는 남자입니다.’란 후자의 주장에 대해서는 판사는 곧장 받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남자란 술어는 주어(페터)로부터 분석돼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실존은 술어가 아닌 까닭에, ‘완전한 존재자란 개념 안에 또한 들어 있을 수 없다. 그 때문에 신은 전능하다.’고 말하는 것과 신은 실존한다.’고 말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상이하다. 물론 우리는 판사가 페터에 대해서 생각하듯이, 신이 실존한다고 여길 수는 있다. 그러나 그로써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증거가 손에 들어온 것은 아직 아니다.

다시 말해 신이란 존재자 또는 대상이 실존하는지 여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보고 만져 보고 냄새 맡고, 간단하게 말해 감각을 가지고 지각을 해봐야 한다. 칸트의 표현을 따라 말하면, 신은 직관 안에 들어 와야 한다.” 그런데 신은 감각으로써 파악되지 않고 단지 사유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철학자의 비유를 들어 말하면, 마음속에 생각하는 일백 탈러[Taler, 독일의 옛 화폐 단위]와 마찬가지로, 신은 더 이상 실존하는 게 아니다. 마음속의 일백 탈러는 우리의 금고를 채워 주지 못한다. 이로써 칸트는 존재론적 신 증명을 무너뜨렸다.

인식 비판과 신 존재 증명 비판을 통해서 칸트는, 자신이 말했듯이, 믿음의 여지를 만들어 주기 위해 당시의 형이상학[초월적인 것들에 대한 학문]을 공박했다. 그렇지만 그는 실제로는, 이를테면 오늘날 90% 이상의 독일인들이 더 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고 사랑의 신으로 하여금 사랑의 신이게끔 하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게 만드는 데에 기여했다. 그는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기독교 신앙의 혁신을 위해 도운 것 이상으로 그것을 파괴시켰다.

그가 얻은 명성 역시 이에 상응한다. 오늘날까지도 그는 모든 것을 허물어뜨린 자”, “사유 왕국의 위대한 파괴자라고 불린다. 심지어 하인리히 하이네는 칸트를, 1793년 루이 16세를 단두대에서 처형시킨 혁명가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에 비유하기도 한다. 하이네에 따르면 칸트의 업적은 그보다 더 위대하다. 왜냐하면 칸트는 하늘의 군주를 그의 호위대와 함께 권좌에서 몰아낸 것이다.”

칸트의 평온한 생애는 이 명성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잇달은 주석에 따르면 칸트에서 삶의 이력은 삶도 역사도 갖고 있지 않다.”

임마누엘 칸트는 1724422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가죽 제품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두 형제들 가운데 넷째였고 밑의 여동생까지 포함해서 형제들 중 가장 오래 살았다. 당시 발트 해 연안에 위치한 인구 5만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는 프로이센의 영토에 속했으며, 주요한 수공업 도시 중 하나로 꼽혔다. 세계 각지의 선박들이 도시의 항구로 모여 들었다.

그렇지만 칸트는 도시의 국제적 분위기와는 달리 오히려 매우 협소한 교제 범위 속에서 성장한다. 상업적 재능이 그다지 많지 않던 아버지는 당시 일반적이던 경제 호황의 기류에 편승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가족이 궁핍한 처지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칸트는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에게 더 많은 애착을 느꼈다. 경건주의 교파의 신도였던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은 부인이었으며 또한 탄탄한 문학적 교양도 함께 갖추고 있었다. 훗날 철학자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기술했다.

어머니를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녀는 처음으로 내 안에 선의 씨앗을 심었고 가꾸었다. 그녀는 자연의 인상들을 향해 내 마음을 열어 주었고, 내 생각들을 일깨우고 넓혀 주었다. 어머니의 가르침은 내 삶에 언제나 지워지지 않는 건강한 영향을 불어 넣어주었다.”

칸트의 어머니는 또한 그의 지적 재능을 맨 처음 발견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경건주의 교파 모임의 지도자인 프란츠 알베르트 슐츠 교수에게 그녀의 영리한 아들을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의논한다. 교수는 칸트를 학교에 보내도록 충고한다. 그 당시는 아직 교육이 의무화돼 있지 않을 때다.

1737년에 어머니가 세상을 떴다. 장례는 조용한 가운데”, 말하자면 성직자들의 인도나 소년들의 진혼鎭魂 노래도 없이 진행된다. 교회 서류의 비고란에는 빈곤이라고 적혀 있다. 칸트의 아버지는 죽은 아내를 위한 장례비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1746년 그가 죽었을 때, 그의 장례 역시 똑같이 초라하게 치러진다.

그렇지만 경제적 어려움이 소년 칸트로 하여금, 예컨대 의사 같은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을 목표로 삼도록 만들지는 않았다. 1740년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입학하여 의학 강의를 들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는 순전히 지적 욕구때문이었다.

대학에서 칸트는 어떤 목적에 구애받음이 없이 자유롭게 공부한다. 수학, 철학, 신학, 논리학, 법학 등의 과목에 수강을 신청한다. 그는 살아 계실 때 아들이 성직자가 되기를 원했던 어머니의 바람을 따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무렵 그에게 철학자가 되겠다는 뜻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1746년 칸트는 아마도 졸업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학교를 떠나야 했다. 22세의 칸트에게 대학은 어떤 강사직도 제안하지 않았다. 그는 가정교사를 하며 생계를 이어가야 했다. 그 후 6년 동안이나 지속된 공백기는 문자 그대로 침잠의 시절이었다.

낮은 사회적 위신과 보잘 것 없는 보수의, 그야말로 생계를 위한 직업인 가정교사는 독일의 위대한 사상가들이 더 이상 다른 살 길을 찾지 못할 때 종종 택했던 일자리다. 철학자 셸링, 피히테, 또 헤겔이 그랬다. 귀족들의 자식들을 가르쳐야 했던 질풍노도의 시인 야콥 미하엘 라인홀트 렌츠는 당시 가정교사의 처지를 이렇게 기술한다. “몇 줌의 금화를 위해 한 개인의 자유를 팔았다면, 그가 하인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그는 그의 주인이 무제한의 권력을 행사하는 노예이다.”

칸트 역시 가정교사 일을 굴욕적인 것으로 받아들였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이때의 삶에 관해 거의 언급한 적이 없다. 어쨌든 그가 가정교사직을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은 것만큼은 틀림없다. 어린애들을 다루는 일은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적어도 그는 이 시절을 두고 다음과 같이 실토한 적은 있다. 아마도 나보다 더 훌륭한 교육 원칙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나보다 더 나쁜 교육자는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칸트의 생애에 대한 훗날의 연구는 그가 여러 차례 자리를 옮겨 다니며 가정교사 노릇을 했다는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일한 곳은 1753년 무렵 독일 제국의 카이저링 백작 부인의 집이다. 사교계의 유명한 부인인 카롤리네 샤를로테 아말리에는 베를린 왕립예술원의 회원이었으며, 또한 독일어 철학 문헌을 프랑스어로 옮기는 번역가로서 명성도 누리고 있었다.

소문을 그대로 믿는다면, 칸트와 친숙한 관계를 유지한 백작 부인은 그의 가정교사를 형이상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육체적으로도 사랑했다. 그렇지만 칸트의 신중한 성격 자체가 이미 그 소문을 부정하고 있다. 그에게는 위험스런 모험에 몸을 던질 만한 저돌성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그 소문은 위대한 철학자를 또한 남자로서 평가하고 싶어 하는 친구들의 입에서 나왔을 것이다.

칸트는 다른 많은 철학자들의 경우처럼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 다음과 같이 밝힌 적이 있다. “내가 여자를 필요로 할 때는 한 여자도 부양할 수 없었고, 내가 여자를 먹여 살릴 수 있을 때는 여자가 필요 없어졌다.”

칸트는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 부인이라는 열등한 위치에 대해 평생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가 생각하는 여인상이란 부엌에서 일하는 여자이다. 여자들은 마치 여교수처럼 부엌살림을 꾸려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칸트 자신 친구들이 요리 비판을 하나 써보라고 종종 권할 만큼, 요리에 대해 일가견이 있었다.

카이저링 백작 부인은 수공업자의 아들인 칸트에게 상류 사회의 기본 예법을 가르쳐 우아한 사회에서 더 이상 촌스럽게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 준다. 30대의 칸트 모습을 담은 초상화 역시 그녀의 작품이다. 이 초상화와 칸트를 그린 또 다른 그림들과 비교해 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띤다.

그림들 속 칸트는 무겁게 보일 정도로 몸에 비해 큰 머리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큰 머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관상학적으로는 수학자 유형이라고 부른다. 이에 비해 코나 입, 턱은 연약해 보이고, 또 튀어 나온 이마에 비해 쑥 들어가 있다. 얼굴에는 열정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에서는 예민한 감성을, 그리고 장년을 지나 노년이 돼가는 칸트를 그린 그림들에서는 뚜렷하게 새겨진 현실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칸트의 키는 불과 159cm였다. 무거운 머리는 연약하고 다소 등이 굽은 몸에 얹혀 있다. 좁고 밋밋한 가슴은 그에게 협심증의 괴로움을 주었는데 이로 인해 그는 삶 자체에 싫증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렇지만 그는 정신의 힘으로 불안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있었고, 그래서 그는 머릿속의 불안에도 불구하고 밝고 명랑하게지냈다. 칸트는 평생 그 외의 별다른 중병을 않은 적은 없다.

아마도 병약한 신체조건이 칸트로 하여금 무엇에 대해서든지 언제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신중한 태도를 취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가 정말로 마음을 터놓고 친구를 사귀는 경우란 흔치 않았다. 그는 반말을 하면서 허물없이 지내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그는 같은 도시에 살던 여동생과 싸운 때를 제외하고는 25년 동안 말을 나누지 않았다.

칸트는 일기를 쓰지 않고, 또 친구들에게 자신에 관해 말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던 탓에, 가정교사 시절 그가 어떤 책들을 읽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1755년 가정교사 일을 그만뒀다는 사실이다. 같은 해 그는 불에 대하여란 제목의 라틴어로 된 논문으로 학위를 받고, 형이상학적 인식의 근본 원칙들을 다룬 교수자격 취득 논문이 통과함으로써 대학에서 강의할 자격을 얻었다. 31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강사가 된 것이다.

칸트가 강사로서 처음 출발한 곳은 그가 세 들어 살던 교수 친구의 집이다. 강의실은 꽉 찼다. 강의실에 들어서 기대와 흥분이 섞인 청강생들의 얼굴을 보자 강사는 당황했다. 그는 강의의 갈피를 잃어버리고 평소보다 더 불분명한 말투로 얘기했다.

그렇지만 강의는 성공이었다. 청중들은 그의 수줍음을 겸손의 표시라고 여겼다. 참석한 한 수강생에 따르면, 그가 강연을 시작하자 청중들은 금방 폭넓은 학식을 가진 사람이 얘기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 결과 다음날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강사는 훨씬 더 많은 청중을 불러 모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칸트가 그 무렵 학자로서 전혀 유명세를 가지고 있지 않은 터라 강의가 처음부터 그렇게 성공을 거뒀다는 것은 하나의 수수께끼이다. 그러나 상황은 곧 바뀐다. 해가 거듭하면서 칸트는 형이상학, 논리학, 인간학, 자연과학의 주제를 다루는 일련의 논문들을 발표하고 철학자, 자연과학자, 사상이 풍부한 저술가라는 명성을 얻는다. 그렇지만 그의 비판서 이전에 나온 논문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논문이 출판을 맡은 출판업자가 인쇄 도중 파산하는 바람에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칸트가 가장 충실한 종으로서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헌정한 천체 이론과 일반 자연사(1755)란 제목의 논문이다. 칸트는 여기서 영원의 심연”, 더 정확히 말하면, 우주의 생성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 이 신비스런 사건에 대한 그의 대답은, 비록 세세한 점들에서는 현대의 연구들을 통해 수정됐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이제껏 제시됐던 어떤 설명들보다 현대적인 것으로 지금도 간주되고 있다.

이에 따르면 우주는 단순한 두 가지 자연의 힘으로부터 도움을 받아 발전했다. 끌어당김(인력)과 되밀치기(척력)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두 힘이 태초의 혼돈으로부터, 오늘날 천체에서 보게 되는 조화가 생겨나도록 했다. 천체는 점차 우주의 모든 작은 덩이들을 흡수했고 행성과 위성들은 최종적인 궤도를 갖게 됐다. 그리고 이들이 궤도 내에서 한시도 멈추지 않은 채 움직이는 것은 끌어당김, 충돌, 반동을 통해서 야기된, 위력적인 최초의 소용돌이때문이다.

만약 이 소용돌이가 점차 질서 속에서 활력을 잃는다면, 그땐 체계가 깨지고 엄청난 우주의 재앙에 의해 질료들이 다시 전 우주에 흩어지는, 새로운 태초가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다시 예전의 법칙에 따라 또 다른 우주 생성이 시작될 것이다. 칸트가 단순한 형태로 전개한 천체론은 50년 후 프랑스의 천문학자, 피에르-시몽 라플라스에 의해 실험을 통해 대부분 뒷받침되고, 그때부터 전 세계 천문학자들 사이에 토론의 주제가 된다(‘칸트-라플라스 이론’).

그러나 칸트의 유명한 천체 이론과 일반 자연사에는 또 하나의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칸트는 우주 생성을 설명하면서 처음으로 오직 자연적 근거만을 제시한 학자였던 것이다.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그의 이론 안에서는 신은 단지 거친 질료의 제공자로만 등장할 뿐이다. 이후의 구체적인 작업, 말하자면 우주의 구성에 있어서는 더 이상 신이 해야 할 일은 없다. 그래서 젊은 칸트는 한때 이런 오만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내게 질료를 다오. 그러면 너에게 우주를 만들어 보이겠다.”

칸트에게서 신을, 말하자면 지상으로부터 쫓아낼 수 있는 일이 가능했던 것은 우주의 창조와 우주의 생성을 엄밀하게 구별했기 때문이다. 신은 단지 역동적인 질료만을 창조한다. 그러나 우주의 질서는 스스로 생성된다. 칸트 이전의 학자들은 이 차이를 알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신이 무로부터 질료를 만드는 것이나 우주의 형성이 다 동일한 방식의 창조 행위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세계 구성에 신이 간여했다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칸트의 강사 시절 초기에는 맡은 수업 시간이 일주일에 30시간에 달하기까지 한다. 수학, 물리학, 지리학, 인류학, 교육학, 자연법, 자연신학, 철학 등이 당시 그가 개설한 과목들이다.

그는 이렇게 지나치게 많은 강의 시간을 불평하면서, 매일 올라야 했던 강단을 무거운 해머를 가지고 박자를 맞춰가며 두들겨야 하는 모루에 비유하였다. 게다가 대학에서의 그의 지위 역시 나아지지 않는다. 여전히 그에게는 철학 교수의 자리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15년 동안을 강사 신분으로 지낸다.

그 이유는 적어도 처음 얼마동안은 7년전쟁이 발발한 때문이었다. 프로이센 정부로선 군인이 아쉽지 철학자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게다가 쾨니히스베르크가 러시아인들에 의해 장악되면서 교수 채용은 한동안 이들에 의해 결정된다.

칸트의 수입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정말로 생계를 위해 가장 아끼는 재산-책들-을 처분해야 했고, 구할 수 있었던 거처는 대개 다락방이었다. 그는 또 도무지 시끄러운 것을 참을 수 없는 성격 때문에 자주 이사를 한다. 옆집의 닭 우는 소리도 그에게는 집을 옮겨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과도한 양의 연구, 형편없는 수입, 병약한 몸, 이런 조건들을 모두 잘 이겨내기 위해 그는 일찍부터 규칙적인 생활 방식에 적응한다. 그의 생활 태도는 나중에 심리학자들의 관심거리가 되기도 한다.

칸트의 성격을 연구한 심리학자들은 자기의 성취에 대해 거의 한 번도 의심하지 않는 의지의 인간이 보여주는 가공할 정력에 대해 한결같이 감탄한다. 실제로 칸트에게는 슬럼프나 창조의 위기 같은 걸 찾아 볼 수 없다. 그가 자기 사상을 일체 발표하지 않았던 시기 가운데 가장 길었던 기간(1770-1780)은 깊은 사색의 시기였다.

그렇지만 심리분석가들은 이 철학자에게는 다른 한편으로 소시민적인 특성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한 논문의 표현을 빌려 말하면, 그는 삶의 야수적인 사실성을 무력하게 마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그의 근본 기분은 점점 더 우울하게바뀐다.

이러한 심리 분석은 칸트 자신이 한 표현들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적은 몫의 생명력때문에 활동 범위를 더 광범하게 넓힐수 없는 것에 대해 하소연한다. 일신상의 변화를 마치 어떤 위협적인 것으로 여긴 그는 평생 한 번도 쾨니히스베르크 주변을 떠나지 않았으며 다른 도시로 여행을 감행한 적이 없다. 그가 한번은 영국에서 온 손님을 아연케 했던, 런던에 관한 소상한 정보도 다른 세계지리에 대한 지식들처럼 책을 통해 안 것이다. 그는 거실 안의 학자였다.

1769년에 드디어 에어랑겐 대학이 그리고 그 1년 뒤에는 예나 대학이 칸트에게 교수직을 제의하자, 베를린의 교육 당국도 마침내 칸트 문제를 논의한다. 그리고 이 46세의 강사를 형이상학과 논리학의 정교수로 즉시 임명하기로 결정한다.

그 후 그는 26년간을 교수로 재직한다. 그는 1786년과 1788년에 대학 총장을 두 차례 역임한다. 그렇지만 교수가 되었다고 해서 그의 재정적인 어려움이 당장 해결된 것은 아니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교수로 일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가난을 약속받은 것과도 같은 일이었다. 경이적인 그의 활동을 평가 받아 보수가 거의 세 배로 뛰어 오르게 된 것은 교수로 재직한지 16년이 지난 뒤이다. 그 후로는, 또 저술활동으로 들어오는 수입의 덕택으로 그는 죽는 날까지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고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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