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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도를 러시아에 알리는 일에 자부심 느낍니다 [서울]
증산도를 러시아에 알리는 일에 자부심 느낍니다
서울신문 2008.4.9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14)
증산도 상생문화硏빅토르 앗크닌
대전시 중구 선화동의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는 민족종교 증산도 사상의 학술적인 정리와 연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는 증산도의 대뇌격
기관. 외국인 3명을 포함한 25명의 연구원이 크고 작은 모임과 세미나를 이어가며 증산도 사상을 국내외에 알리기 위해 호흡을 맞추고
있다. 이곳에서 증산도『도전(道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는 막바지 작업에 매달려 있는 캐나다 국적의 연구원 빅토르 앗크닌(56). 옛소련
하카스 자치주의 원주민 출신으로 한국의 증산도와 한국문화를 러시아에 알리기 위한 첨병 역할을 4년째 맡고 있는 유별난 언어학자이자 문화
호사가이다.
● 옛 소련 하카스 자치주 원주민 출신
증산도『도전』을 양손에 든 채 1층 자료실에서 객을 맞은 빅토르 앗크닌은 외국인이라기보다는 한국인에 아주 가까운 동양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구소 주변에 흐드러진 봄꽃만큼이나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손을 내민 앗크닌은 능숙한 한국어로 증산도의 요체를 펼쳐놓았다.
시베리아 아래 크라스노얄스크 남쪽, 인구 12만명의 작은 도시 아바칸에서 홀어머니 슬하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옛 소련 자치주의
원주민이 환갑에 가까운 나이에 한국의 증산도, 아니 한국문화에 깊숙이 빠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증산도에 입도(入道)하면 그 순간부터 증산도에 매몰될 수 밖에 없지요. 순수하게 증산도를 보기 위해 객관적인 제3자의 입장을 지키고
있습니다.
증산도를 웬만한 증산도 도인들보다 더 잘 알고 있지만‘비신자’로 머물러 있다는 앗크닌. 그는 자치주 원주민이란, 이른바 출신 성분
때문에 적지 않은 불이익을 감수해야만 했던 지난날을 넌지시 들춰낸다. 레닌그라드대(현 상트페테르 부르크 국립대) 역사학부에 다니던
형이“언어에 재능이 있는 것 같으니 레닌그라드대 외국어학부를 지원해 보라.”고 권유해 고교 졸업을 2년 앞두고 레닌그라드대학에 입학하고
싶다는 뜻을 간곡하게 담은 편지를 직접 썼다고 한다. 모국어와 가까운 터키어를 전공하고 싶었지만 입학연도엔 터키어과 모집이 없어 대신
일어과를 지원했는데 그만 낙방하고 말았다.
“레닌그라드대 일어과는 최상의 출신성분에 최고 점수를 맞아야만 들어갈 수 있었어요. 자치주 소수민족의 애환을 처음 알았지요.”결국
차선의 선택으로‘조선어학과’에 들어간게 사실상 한국과 맺은 인연이라면 첫 인연이다.
대학 재학시절 소련에서의 한국에 대한 인식은 거의 적국수준. 졸업을 해도 마땅히 할 일이 없을 만큼 조선어학과 학생들은 찬밥신세였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어가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었다. 조선 역사와 문학, 민속학, 종교까지 파고들었으니‘한국학’을 제대로 공부한 셈이다.
레닌그라드대 재학중 북한의 김일성대학에 유학해 중세 조선어사와 문법, 역사도 배웠다. 레닌그라드대에서 조선어부터 시작해 영어, 중국어,
일어를 배웠고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언어학연구소 석사과정을 하면서 러시아어, 독일어, 만주어, 몽골어, 에벵키어, 타타르어를 더해 자유롭게
구사하는 언어가 무려 11개 국어나 된다.
“대학 시절, 그때만 해도‘결코 갈 수 없는 나라’였던 남한에서 직접 들어온 책이란 찾아볼 수가 없었어요. 신문이나 TV에서도 한국과
관련해 좋은 쪽 이야기들은 아예 보거나 들을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 생애 처음 본 한국인 고송무씨와 교유… 한국공부힘써
1970년대말 핀란드 헬싱키에서 만난 고송무(1947∼1993)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남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고송무는
중앙아시아에서 한인들을 연구하는 데 몸 바쳐‘고려인 연구분야의 선구자’로 통하는 인물. 당시 헬싱키국립대 한국어 교수였던 고송무와
교유하면서 얻은 국어사전이며 잡지들을 몰래 갖고 삼엄한 러시아 국경을 넘을 때 진땀을 얼마나 흘렸을까.
한국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져 갔고 1985년부터는 유럽한국학협회 회원 자격으로 한국학 관련 학과가 설치된 유럽의대학들을 돌며 논문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90년 한·소 수교가 됐지만 여전히 소련에선 한국 관련 책이며 문헌들을 보기란 수월치 않았다고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 한국어문화센터 부소장으로 일한 지 6년쯤 됐을까. 우연히 접한 증산도 사상서『이것이 개벽이다』요약집『( 개벽
다이제스트』)에 눈이 번쩍 뜨였다고 한다.
“종교·사상서에 앞서 한국의 문화와 고대역사, 철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독특한 책이었어요. 러시아를 비롯해 서양인들에겐 생소한
후천(後天)이며 개벽, 원시반본(原始返本)사상이 눈에 쏙 들었습니다.”
1년에 걸쳐 요약집을 러시아어로 모두 번역해 놓았다. 그 때문이었을까. 한국에서도 이름이 알려져 수교 이듬해부터 수년간 학술진흥재단과
대학들의 초청으로 무려 15차례나 한국을 다녀갔다고 한다.
소수민족 출신으로 겪은 인생의 첫 좌절 기억에 얹혀, 탈이데올로기를 앞세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에도 불구하고 변화하지 않는 소련의
현실에 불만이 컸던 것 같다. 결국 2000년 소련 생활을 정리하고 캐나다 이민을 택했다.
“이민 후 본격적으로 러시아 문화와 한국 문화의 관계에 집착하게 됐지요. 옛 소련 자치주였던 터키계 저의 모국 언어와 한국어는 많은
유사점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샤머니즘의 상관성도 아주 많고요.”
한국·캐나다 문인협회에 들어가 러시아와 한국의 시문학들을 서로 비교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자신을 수소문한 증산도측이
증산도『도전』의 러시아어 번역을 의뢰해온 데 선뜻 응했고 4년째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증산도『도전』의 러시아판은 영어,
일어, 중국어, 독어, 불어, 스페인어 등 6개 언어 번역에 이은 마지막 번역작업. 900여쪽 분량으로 번역되어‘러시아판 도전’이 사실상
마무리됐지만 마지막 정리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다.
“증산도와 인연이 돼서 지금 한국에 몸을 두고 있지만 따져보면 먼 옛날부터 한국에 오도록 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문화의 많은
부분을 담고 있는 증산도『도전』을 러시아인들에게 알리는 기수 역할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 틈만 나면 사찰·박물관 등 찾아다녀
‘우주 순환의 큰 판 짜기’, 증산도에서 흔히 말하는 도수(度數)를 인용해 자신의 한국살이를“내 뜻이 아닌, 누군가가 정해놓은 길”로
받아들인다는 앗크닌. 틈만 나면 훌쩍 떠나 사찰이나 박물관 등 한국의 문화를 알 수 있는 구석구석을 뒤진다. 한국인을 닮은 생김새
때문인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외국에서 오래 살다가 고국에 돌아온 한국인”으로 보아주는 게 재미있고 반갑단다.
“서양의 시간관이 직선적이라면 동양의 시간관은 순환성이 아주 강합니다. 개개인이 자신의 근본과 뿌리를 찾자는 원시반본도 결국 동양의
순환적인 시간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그래서 요즘은 부쩍 천도교며 원불교 같은 한국의 다른 민족종교들을 비교하는 데
관심이 많아졌다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너무 서두는 게 큰 흠인것 같아요. 뿌리와 근본을 찾아가는 원시반본이 중요하지만 천천히 나를 돌아보는
느림의 원시반본이야말로 지금 한국인들에게 소중한 가치가 아닐까요. 내가 한국에 사는 것도 그 길을 찾기 위한 작업인 것 같아요.”
글·사진 대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빅토르 앗크닌
●1952년 옛소련 하카스 자치주 아바칸 출생 ●1973∼1974년 김일성대학 유학 ●1975년 레닌그라드 국립대학교 동양학부 조선어과
졸업 ●1980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언어학연구소 석사 ●1980∼2000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언어학연구소 연구원 ●1991∼2000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한국어 문화센터 부소장 ●2000년 캐나다 이민 ●2002∼2004년 한국·캐나다문인협회 회원 ●2004년∼
증산도 상생문화연구소 연구원, 증산도『도전』러시아어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