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풍속사전

풍물굿

2013.06.17 | 조회 5383

풍물굿

 

 

 

 

풍물굿이란

 

농사일을 하던 우리네 조상들이 쇠, 징, 장고, 북 등 4가지 악기를 중심으로 가락을 치며 춤과 함께 노래와 재담, 사설, 재주 등과 연극적 요소를 가미한 총체적 연희를 말한다. 풍물굿은 음악성이 두드러진 풍물과 제의성이 두드러진 굿의 결합이다. 신교음악인 풍물굿은 풍장?두레?매구?굿?풍물놀이?풍물 등 지역마다 다르게 불렀는데, 근래에는 사물놀이란 말로 유행하고 있다.

 


기원과 그 변천

 

풍물굿은 원시시대의 풍농?안택을 비는 제천의식이나 노동의 율동에서 출발하고 이것이 점차 집단생활 속에서 놀이, 축원, 연극형태로 발전되어 사람들이 즐기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삼국지 』 「위지」 동이전에서 우리는 풍물굿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우리민족에게 나타났던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과 같은 제천의식에서도 비록 사물이 동원되지는 않았을지라도 함께 춤추고 노래하며 즐기는 집단적 놀이마당이요 제의과정이었으리라 추측된다. 이러한 의례에는 종교적 의례, 공동노동, 놀이의 성격이 혼합되어 있었을 것이다. 이 의식에 수반되는 가무연희歌舞演戱 과정에서는 풍물의 초기형태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원시적으로 지속되던 풍물굿은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생활 전반에 고르게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 풍물굿은 태조 때(918년)부터 궁중행사에 등장하였으며 사찰이나 민가에서도 중요한 연중행사 때에는 없어서는 안 될 놀이였다. 또한 풍물굿은 농사일을 할 때나 부락의 제사(당산제, 기우제) 때도 반드시 따르게 마련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 풍물굿은 더욱 보편화되어 가는 한편, 연희적 기능이 급속히 추가되면서 의식성이나 노동음악으로서의 기능이 줄어든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앙법의 도입과 더불어 발전하였다. '두레'는 조선 중?후반기에 이앙법이 들어오자 농업생산방식의 특징상 농번기(모내기, 김매기)의 절기마다 집약된 노동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만들어진 노동조직인데, 이러한 집약된 노동이 효율적인 노동관리를 필요로 하게 됨에 따라 전국적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두레는 풍물굿의 존재 바탕이었으며,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풍물굿의 모습은 두레라는 조직이 새로 생기면서 더욱 발전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조선사회는 상품화폐관계의 발전으로 상업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두레풍물굿은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기량을 보여주고 돈을 받는 걸립풍물굿으로 변모하게 된다. 판굿의 발전도 이때부터 활발해진다. 19세기 말 경에는 아예 자기 마을의 근거를 떠난, 즉 노동으로부터 분리되고 기량이 뛰어난 풍물꾼들이 전문 사당패로 나서게 된다. 사당패는 전국 각지를 돌며 연행을 하기 때문에 각 지역의 풍물굿이나 재주를 흡수하고, 동시에 각 지역의 풍물굿 발전에 기여했다. 그리하여 조선 말기에는 풍물굿이 중부 이남 지역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 놀이문화였다.

 

풍물굿의 쇠퇴는 일제의 지배를 받으면서였다. 일본제국주의의 강제적인 조선침략은 민중의 독자적 문화로 발전 가능성을 지니고 있던 풍물굿을 왜곡하고 역사적으로 단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적으로 두레조직을 통해 상부상조하던 공동노동의 성격이 상호노동의 대가를 화폐로 지불하거나 부역이라는 미명하에 강제노동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두레풍물굿은 일제의 식민지 농업정책의 일환인 농업수탈정책에 이용되어 노동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풍물반주나 기방의 눈요깃거리로 전락하였으며, 사당패 중 일부는 조선총독부의 전선농악대에 흡수됨으로써 민중문화의 내용을 상실해 버린다. 또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인 민족문화말살정책은 풍물굿을 낭비적인 것, 미신적인 것으로 매도하여 민족문화로 성장할 길을 차단하고 실제 지니고 있던 대동놀이굿의 성격을 상실한 기능만의 풍물굿으로 박제화시켰다. 심지어 일제 말기에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군수물자 헌납을 빙자해 마을마다의 풍물(악기)을 몽땅 빼앗아가기도 하였다.
 
해방 후 잠시 되살아나는 듯 했던 풍물굿은 한국전쟁과 급격한 산업화 정책으로 인하여 역사적 단절을 극복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또한 서구문물의 숨막히는 유입 속에 대다수 민중들이 향유하던 풍물굿은 미개의 광음이란 반주체적 오판아래 다시금 밀려나고 말았다. 특히 60년대 이후 농촌에서나마 간신히 남아있던 풍물굿은 새마을운동의 과정에서 '미신'적인 것으로 낙인찍혀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민중문화로 발전시킬 수 있는 가능성마저 잃어버렸다.


 

악기 구성과 짜임

 

풍물굿의 악기는 꽹과리, 징, 장고, 북, 소고, 나발, 태평소 등이 중심을 이룬다. 꽹과리는 풍물굿의 리더 구실을 하는 악기이다. 흔히 '쇠'라고 하며 '매구', '깽매기' 등으로도 일컫는데, 쇠를 치는 사람을 '상쇠'라 한다. 쇠는 풍물굿판에서 자극적이면서도 충동적인 가락으로 사람의 감정을 고조시키고 흥을 돋구는 역할을 하는데, 풍물패의 선두에서 치배들을 이끈다.

 

징은 금속 타악기의 하나로 본래의 소리는 '정'이지만 징으로 굳어졌다. 징은 원박을 정확하게 쳐주는 것이 중요하며, 사물의 가락을 모두 감싸서 멀리 울려 퍼지게 한다. 풍물악기 가운데 가장 은은한 소리를 내며, 포용력이 있는 악기라 할 수 있다.

 

장고는 장구라고도 한다. 장고는 풍물굿의 악기 가운데 유일하게 음양성을 낼 수 있는 악기이며, 양편의 머리가 크고 허리가 가늘어서 '세요고'라고도 한다. 장고의 왼쪽(궁편)은 가죽이 두껍고 소리가 낮으며, 오른쪽(채편)은 가죽이 얇고 높은 소리를 낸다. 장고는 풍물굿판에서 분위기를 흐드러지게 하고 풍성하게 만드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악기이며, 민요나 춤 장단을 칠 때는 궁편을 손으로 치기도 한다.

북은 구조가 간단하여 손쉽게 다룰 수 있으며, 풍물굿의 악기 가운데 역사가 가장 오래되고, 세계 어디에서나 그 발생을 볼 수 있는 악기이다. 북은 다양한 가락을 연주하기보다는 박을 힘있게 짚어가면서 다른 가락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데, 치는 방법에 따라 외북(춤 위주)과 쌍북(가락 위주)으로 나누어진다.

 

소고는 풍물굿에 쓰이는 작은북으로 '법고', '버꾸', '매구북'이라고도 한다. 오늘날의 소고는 옛날보다 크기가 작아져서 장단마다 첫 박에 한 번씩 치며 춤을 추는 것이 고작이다. 소고잽이들은 보통 상모를 쓴다.

 

나발은 길이가 약 115cm이며 원래는 군악기로 쓰였다. 풍물패가 어떤 마을에 들어갈 때 또는 풍물패를 모아 출발할 때, 그밖에 신호용으로 많이 쓰인다. 나발은 대포수, 상쇠, 설장고 중 어느 한 사람이 부는데, 먼저 1초를 울리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치배들에게 준비를 하라는 뜻이 되고, 2초를 울리면 모두 모여 떠날 채비를 하라는 뜻이며, 3초를 울리면 출발하라는 뜻이다.

 

태평소는 전체 길이 약 30cm의 원추형으로 '날라리', '새납', '호적'이라고도 부른다. 선율악기 가운데 성량이 가장 높으며, 지공(구멍)은 모두 8개이고 그 중 첫 번째 구멍은 뒷면에 있다. 태평소는 본래 궁중의 대취타에 쓰였는데, 걸립형태 때 들어와 풍물굿을 한층 더 풍성하게 한다.

 

풍물패의 짜임은 지역이나 연희형태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보통 20~30명 정도로 구성된다. 풍물패는 보통 기수(농기), 취군(나발-태평소), 앞치배(쇠-징-장고-북-소고), 뒷치배(잡색) 등의 순서로 짜여지며, 잡색의 경우는 치배와 구경꾼 사이를 이어주면서 일정한 대열 없이 흥겨운 춤으로 신명을 돋운다.

 

풍물패의 복색은 흰 평복에 파란색, 빨간색, 노란색의 삼색띠를 드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뒤에 와서 전문 풍물패의 등장과 각종 민속경연대회의 영향으로 곳에 따라 격식이 변하였다.

 
지역별 분류

 

일반적으로 풍물굿은 크게 중부 이북의 경기?충청지역에서 행해지는 웃다리풍물굿과 중부 이남에서 행해지는 아랫다리풍물굿으로 나눌 수 있다. 아랫다리풍물굿은 좀 더 세분할 수 있어 전라도와 경상도로 나누는데, 풍물가락이 특히 발달한 지역은 전라도이다. 전라도는 서울에서 보는 방향으로 왼쪽의 산간지역을 좌도라 하고 오른쪽의 평야지대를 우도라 한다. 웃다리풍물굿은 상쇠의 기능이 뛰어나며, 아랫다리풍물굿은 장고(전라도)와 소고(경상도)의 기능이 발달하였는데, 영동풍물굿, 호남풍물굿, 영남풍물굿으로 구분할 수 있다.
 

풍물굿을 좋아한 증산

 

증산 상제는 어려서부터 풍물굿을 좋아하였다. 여섯 살이던 병자(丙子, 1876)년에 풍물굿을 보고 문득 혜각慧覺이 열렸으며, 장성한 뒤에도 다른 굿은 구경하지 않았으나 풍물굿은 자주 구경하였다.(道典 1:19:1 참조)

 

증산 상제는 을사년 4~5월경 정읍 태인에서 벌어진 풍물굿을 구경하였다. 이런 일도 있었다.

 

“상제님께서는 풍물굿을 좋아하시어 굿을 즐겨 구경하시니 호연이 “안보여”하면 어깨에 태우고 보시는데, 구경하다 흥이 나시면 풍물패에 직접 뛰어들어 장구도 치시고 꽹과리도 치시니라. 한번은 술을 동이째로 흠뻑 드시고, 홀로 뱅뱅 도시면서 풍물을 가랑이 사이로 넣었다 뺐다 하며 치시니 그 모습이 가히 일품이더라.”(道典 3:124:1~3)

 

한편 고수부는 풍물패를 불러 수왕水旺공사를 보아 창생의 기근을 면하게 하였다.(道典 11:196 참조)

호남지역은 역사적으로 풍물굿이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마한시대에도 방울 달린 깃발의 농기 아래서 줄지어 노래하고 춤을 추었으며, 백제 무왕은 궁중에서 대신들과 함께 음악을 직접 연주하며 신하와 손을 들고 춤을 추었으며 일본에 탈춤 및 기악을 보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에도 부안 · 정읍 · 임실 · 남원은 신라의 당나라 통로로서 문화사절단 왕래의 거리였다. 그 후 조선시대에는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공사에 전국의 풍물패를 불러서 공연하기도 하였는데, 그 인부 · 명창 · 풍물패원들이 이후 정읍의 보천교 건축장에 모여들어서 풍물굿을 하기도 하였다. 일제 시대 당시 정읍 대흥리의 '보천교'에서는 이 풍물굿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널리 장려했다. 보천교 십일전 낙성식 때에는 200여 명의 기능인들이 초청되어 대대적인 공연을 벌였다. 특히 보천교의 차경석은 풍물을 종교음악으로 지정 우대하고 찬송하도록 하였고, 풍물 기능인들을 초청 몇 달 동안 계속되는 대대적인 종교 악공연을 함으로써 풍물을 육성 발전시켰다. 호남우도풍물의 기틀이 갖춰진 것은 바로 이 시기, 즉 1920년에서 1930년 사이이다. [강영한]

 
참고문헌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편, 『한국민속대관 제5권 - 농악』,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소, 1982.
김원호, 『풍물굿 연구』, 학민사, 1999.
김헌선, 『풍물굿에서 사물놀이까지』, 귀인사, 1991.
송지영 편, 『민속예술사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79.
주강현, 『굿의 사회사』, 웅진출판사, 1992.
 

twitter facebook kakaotalk kakaostory 네이버 밴드 구글+
공유(greatcorea)
도움말
사이트를 드러내지 않고, 컨텐츠만 SNS에 붙여넣을수 있습니다.
9개(1/1페이지)
EnglishFrenchGermanItalianJapaneseKoreanPortugueseRussianSpanishJavane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