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 칼럼(舊)

바빌론 문명과 바빌론

김현일 연구위원

2022.07.06 | 조회 5267

바빌론 문명과 바빌론

 

구약의 창세기 11장에는 바벨탑 이야기가 나온다.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노아의 후손들이 동방으로 가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에 거주하면서 도시를 건설하였다는 전설이다. 시날 평지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지나는 수메르 지역을 말한다. 노아의 후손들이 그곳에서 벽돌을 구워 돌을 대신하여 과 대를 쌓았다고 한다.(우리말 개역성경) 가장 오랜 성경사본으로 알려진 그리스어 구약성경에는 도시(폴리스)와 탑(퓌르고스)을 쌓았다고 하고 히브리어 성서도 마찬가지로 도시와 탑을 뜻하는 이르믹달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노아의 후손들은 성은 말할 것도 없고 꼭대기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높은 탑을 쌓으려 하였다. 창세기 기록에 의하면 야훼를 비롯한 여러 신들은 인간들이 쌓는 성과 대를 보기 위해 지상으로 강림하였다고 한다.(11:5-7) 그리고 하늘까지 솟은 탑을 세우려는 인간의 교만함을 못마땅해 했는지 그들을 지상에서 흩어버렸다. 그렇게 여러 곳으로 흩어진 인간들은 서로가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들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창세기 11장의 이야기는 수메르 도시들의 건설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인간의 언어가 다양해진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셈이다.

창세기는 그들이 쌓으려고 시도한 성을 바벨이라 불렀다. 구약에 나오는 바벨탑은 전혀 역사적 상상의 산물만은 아니다. 바벨은 바빌론 제국의 수도 바빌론을 가리키며 바벨에 있던 높은 탑이 바벨탑이었다.

현재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80km 정도 떨어진 유프라테스 강변에 위치한 바빌론은 수메르 시대부터 존재한 도시였다. 물론 우루크, 우르, 니푸르 등 그 기원이 BCE 4000년 정도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다른 수메르 도시들보다는 훨씬 후대에 세워진 도시였다. 점토판 기록에 의하면 수메르 시대 말기에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통일한 사르곤 왕(재위 BCE 23342279)이 바빌론의 초석을 놓았다고 한다. 초기왕조 연대기라고 불리는 점토판 문서에는 사르곤 왕이 그의 수도 아카드 옆에 바빌론을 세웠다고 하였다. 그 이후 우르 제3왕조 시대(BCE 2114-2004?)에는 우르의 왕들이 이곳에 총독(엔시)을 파견하여 세금을 거뒀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메르의 한 지방 도시였던 바빌론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된 것은 시리아 사막에서 유목을 하며 살던 아모리 족이 메소포타미아로 진출하여 바빌론을 차지하면서였다. 돌비석에 새긴 법전으로 유명한 함무라비 왕(재위 BCE 1792-1750?)이 그 아모리 왕국의 6대 왕이었다고 한다. 그는 오늘날의 이란 땅에 자리 잡은 엘람으로부터 서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상류 지역까지 정복한 대정복군주였다. 역사가들은 이 제국의 수도가 바빌론이었기 때문에 아모리인들의 이 나라를 바빌론 제국이라고 부른다. 함무라비가 제국을 건설하면서 바빌론은 메소포타미아의 정치, 문화적 중심지가 되었으며 또 후일 아수르 제국, 카시트 제국, 히타이트 제국 등이 연이어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했을 때에도 여전히 문화 중심지 역할을 놓치지 않았다.

바빌론은 아모리인들이 이 도시를 부른 이름인 바빌루의 그리스식 명칭이다. 바빌루는 아카드어로는 신들의 문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바빌론 시를 에워싼 네모난 모양의 성에는 마르둑 문’, ‘이슈타르 문’, ‘엔릴 문등의 신의 이름이 붙은 성문들이 많았다. 물론 신전들로 많았는데 도시의 중심에 위치한 에사길라는 바빌론의 주신인 마르둑 신을 섬기는 신전으로서 기록에 빈번히 등장한다. 수메르어로는 에산길이다. 바빌론의 창세신화인 에누마 엘리쉬에 의하면 마르둑이 바다의 용인 티아마트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큰 신들(아눈나키)이 일년 동안 벽돌을 만들어 이 신전을 세웠다고 한다.

에사길라 바로 앞에는 에테메난키라고 불린 큰 탑이 있었다. 물론 이것도 마르둑 신에게 바쳐진 신전이었지만 지어진 것은 신바빌론 왕국 시대인 BCE 6세기였다. 유대왕국을 멸망시키고 많은 주민들을 바빌론으로 잡아간 느부갓네살 왕이 그가 정복한 여러 지방의 사람들을 데려와 수년에 걸쳐 지었다 한다. ‘에테메난키천지의 기반基盤이라는 거창한 뜻인데 산처럼 높은 신전이었다. 에테메난키를 묘사한 점토판 기록에 의하면 높이는 91m, 사각형으로 된 기단의 한 면 길이도 같은 91m였다. 점토판의 기록은 현대 고고학자들의 발굴에 의해 사실임이 입증되었다.

마치 산과 같이 높이 솟은 이 에테메난키가 바로 창세기의 바벨탑이었다. 이 탑 맨 꼭대기에는 마르둑 신의 신전이 있었고 아래에는 엔릴, 아누, 에아 등 수메르 여러 신들의 신전이 자리잡고 있었다.

기원전 5세기에 활동했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직접 바빌론을 답사한 사람인데 그에 의하면 바빌론 성의 둘레는 480 스타디온이었다. 스타디온은 경기장의 길이로서 600(포데스)에 해당한다. 일보를 30cm로 잡으면 1 스타디온은 180m이므로 바빌론 성의 둘레는 86km에 달했다. 면적으로 보면 서울시 면적의 2/3 정도에 해당하는 엄청난 크기였다. 성벽의 두께는 50페퀴스, 높이는 200페퀴스였는데 미터로 환산하면 23m86m에 달한다. (페퀴스는 팔꿈치로부터 손끝까지의 길이인데 약 44cm로 추정한다) 성벽 위에는 양쪽으로 건물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사이로는 사두마차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성벽이 두터웠던 것이다. 필자는 현재 로마에 남아 있는 로마제국 시대의 성벽인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을 보고 그 높이(16m)에 놀랐었는데 바빌론 성벽은 그보다 몇 배나 높았던 것이다.

함무라비 이후 다섯 명의 후계자들이 다스리는 동안 바빌론 제국은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갔다. 바빌론 제국은 외부 세력의 침입으로 시달렸는데 BCE 1595년에는 아나톨리아에서 내려온 히타이트에 의해 바빌론이 약탈되고 제국은 멸망했다. 히타이트의 지배를 이어 페르시아 만 쪽에서 올라온 세력이 얼마간 지배했다가 다시 이란 고원에서 온 카시트 인들의 지배가 시작되었다. 카시트 인들은 히타이트 인들처럼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유목민들인데 함무라비 시대부터 조금씩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BCE 1475년경 바빌론을 점령하였다. 이들은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였지만 문화적으로는 바빌론 문화를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그들에게는 자신들 고유의 신들이 있었지만 수메르의 신들을 받아들여 그들을 위한 신전을 지었다. 카시트 인들은 300년 이상 (BCE 1475-1155) 메소포타미아를 지배하였는데 이들의 안정적인 지배에 힘입어 바빌론 문화는 중동 일대로 널리 확산되었다. 바빌론 인들이 사용하던 아카드어는 중동 일대의 공용어 역할을 하였다.

카시트 인들의 지배 이후 바빌론을 위협한 주된 세력은 오늘날의 시리아 지역으로부터 세력을 확대한 아람 인들과 메소포타미아 북부의 아시리아였다. BCE 813년과 812년에는 아시리아가 침략하여 바빌론 왕을 아시리아로 잡아간 일도 있었다. 그 다음 세기가 되면 이번에는 남쪽으로부터 갈대아 인들이 세력을 확대해왔다. 이후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아시리아 제국과 갈대아 제국 사이의 대결이 전개되었는데 이집트도 세력경쟁에 뛰어들어 복잡한 역사가 전개되었다. 갈대아제국은 후일 구약성서의 기록자들이 붙인 이름이고 실제로는 바빌론 제국이었다. 아시리아가 총독을 파견하여 바빌론을 통치하였는데 바빌론 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아시리아 총독을 쫓아내었다. 당시 바빌론 사람들이 자신들의 왕으로 세운 인물이 아시리아 군대의 장군이었던 나보폴라살(재위 BCE 625-605)이다. 그는 이란계인 메디아 왕국의 키악사레스 왕과 손을 잡고 아시리아를 공격하여 종교적 수도인 아수르와 정치적 수도인 니네베를 연이어 함락하였다. 피지배 족속들이 손을 잡고 아시리아 제국을 타도한 것이다.

BCE 612년의 니네베 함락으로 메소포타미아의 지배권은 이제 아시리아로부터 신바빌론으로 넘어갔다. 물론 아시리아가 완전히 사라지기까지는 수년 더 끌었다. 아시리아는 수도를 서쪽 유프라테스 강변의 하란으로 옮기고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다시 하란이 바빌론, 메디아 동맹군에 의해 함락되고 아시리아가 완전히 멸망하자 (BCE 609) 그 잔존세력이 이집트의 파라오 네코가 이끄는 군대에 합류하여 마지막 싸움을 싸웠다. 이번에도 결과는 동맹군의 승리였다. (BCE 605) 이 전투가 유명한 카르케미시 전투이다. 카르케미시는 오늘날의 시리아와 터키 국경지역에 위치한 곳이다. 카르케미시 전투를 이끈 주역은 나보폴라살 왕의 아들인 느부갓네살이었다. 카르케미시 전투 직후 부왕이 죽자 그는 왕위에 올라 바빌론 제국을 40년 넘게 다스렸다.(BCE 605-562) 유대왕국을 멸망시키고 히브리인들을 대거 바빌론으로 끌고 간 인물이다. 그는 바빌론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건축에도 힘쓴 사람이다. 앞에서 말한 에테메난키와 고대인들의 찬탄의 대상이 되었던 공중정원空中庭園도 그가 조성한 것이다.  

twitter facebook kakaotalk kakaostory 네이버 밴드 구글+
공유(greatcorea)
도움말
사이트를 드러내지 않고, 컨텐츠만 SNS에 붙여넣을수 있습니다.
117개(1/12페이지)
EnglishFrenchGermanItalianJapaneseKoreanPortugueseRussianSpanishJavanese